어릴 적에는 어둠만이 아니라 고요한 햇빛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이따금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지울 때면 뒤에서 누군가 어른거리는 듯하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곤 했다. 빛과 정적과 짧은 흔들림이 만들어내던, 매우 고요한 공포. 스페인·멕시코 합작 공포영화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은 성장과 더불어 잊혀진 듯했으나 문득문득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키곤 하는 그 두려움을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헬보이>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제작자로 나선 이 영화로 주목받은 신예 후안 안토니오 바요다는 “이 영화에서 두려운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초자연적인 현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오퍼나지…>는 그처럼 현실과 환상의 흐릿한 경계에서 긴장을 찾아낸다.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입양된 로라(벨렌 루에다)는 의사인 남편 카를로스(페르난도 카요)와 어린 아들 시몬과 함께 지금은 빈집이 된 고아원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요양원을 열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회복지사를 자청하는 노파 베니그나가 찾아오면서 거대한 저택에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베니그나는 한밤중에 고아원에 숨어들어 무슨 일인가를 하려다가 달아나고, 시몬마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친구들이 정말 이 집에 살고 있다면서 이상한 놀이를 즐긴다. 시몬이 부르는 이름들은 어린 로라와 함께 고아원에서 살았던 아이들의 이름. 로라가 고아원을 떠난 다음 이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리고 요양원에 들어올 아이들이 도착하던 날, 시몬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런 스토리만으로도 <오퍼나지…>는 숱한 영화들의 참고 목록이 떠오르는 영화다. 시나리오작가 세르지오 산체스는 영화보다는 문학에서 영감을 받았다면서 헨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제임스 배리의 <피터팬>을 언급했고,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다는 <폴터가이스트> <미지와의 조우>가 스토리를 풀어가는 법을 염두에 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감독과 작가가 모두 우연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영화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악마의 등뼈>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디 아더스>와 비슷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리스트에서 겹치는 부분을 골라낸다면 버려지거나 길을 잃은 아이들, 그리고 현실을 침범하는 환상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보호받고자 하는 아이들의 갈망,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애쓰는 어머니의 분투가 이 모든 이야기들에 애틋한 정서를 불어넣는다. 장르에 기반하여 안전한 드라마를 선택한 <오퍼나지…>가 자신만의 정서를 획득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일상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떠나가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나사처럼 소용돌이치는데도, 시몬을 찾고자 하는 싸움을 포기할 수가 없는 로라. 그리고 그녀 앞을 그림자처럼 지나가곤 하는 조그만 아이들의 흔적. 희미한 형체를 깜박이며 서로의 곁을 헤매는 이들이 <오퍼나지…>를 평범하나 서글픈 영화로 만들어준다.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오퍼나지…>는 공포영화로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난데없는 효과음이나 시도 때도 없이 머리 풀고 뛰쳐나오는 귀신에 기대는 공포영화들에 비해 <오퍼나지…>는 놀라게 하는 게 아니라 긴장하게 하는 진짜 공포영화에 가깝다. <오퍼나지…>는 공포 그 자체를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 끔찍한 진실 혹은 장면을 대면한 사람의 반응만을 보여주며 관객이 공포를 짐작하게 하고 상상하게 하여 공포가 스스로 커져나가게끔 한다.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는 바로 그 점, 관객도 상상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테이블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은 놀라움(surprise)이고 사람들이 폭탄이 장치된 테이블에서 카드를 치고 있는데 그 사실을 관객만 알고 있는 것은 서스펜스(suspense)”라고 말했던 앨프리드 히치콕의 정의를 인용하며 <오퍼나지…>를 후자의 자리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