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 감독들이 노(怒)했다. “3천억원의 국고지원금을 전횡”했다면서 영화진흥위원회 해체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는 1월24일 성명을 내 “영화진흥위원회를 해체하고 영상진흥원(가칭)을 설립하라”며 “한국 영화계를 유린한 세력들은 사죄하고 물러나라”고 주장했다. 한편, 노 감독들의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영진위는 노(NO)했다. 영진위는 곧바로 보도자료를 내고 “영화감독협회 등 일부 영화계 인사들과 일부 언론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어림없는 비방을 멈추라는 반박이다. 명예훼손에 대한 법적 대응도 준비 중이다. 원로 영화인들은 도대체 10년 동안 뭘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되찾겠다고 나선 것일까.
1. 영진위가 국민들의 혈세를 도적질했다?
감독협회가 영진위 해체 근거로 내세운 첫 번째는 ‘3천억원 전횡’이다. 대부분 관련 보도들의 머릿제목이 이를 일러준다. 심지어 국고지원금을 ‘횡령’했다고 제목을 뽑은 기사까지 있다. 감독협회 성명서에 따르면, 영진위가 설립된 이후 2007년 말까지 “3천억원 규모의 진흥재원이 동원됐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소진되고 말았다”. 정인엽 감독협회 이사장은 “자생력 갖춘 제작사가 몇이나 있느냐”며 “영진위는 그동안 펀드 만드는 데만 돈을 썼고 결국 제작편수만 늘려서 수익률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괜히 “실효도 없었던” 투자조합 사업에 올인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진위는 먼저 “9년 동안 소진성 사업에 쓰인 돈은 795억원이며, 이는 대단히 정상적인 공공재원 운용관리였다고 자평한다”고 말했다. 영진위는 반박 보도자료에서 또한 “2007년까지 금고에서 모두 615억원을 출자해서 2475억원 규모의 한국영화 투자를 유도했다”고 밝히고, “지난해 기준으로 연간 한국영화 제작에 4천억원의 재원이 투입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영진위의 투자조합 출자가 제작 과잉을 야기했고, 다시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는 건 대단한 논리의 비약”이라고 받아쳤다. “투자를 활성화한 지렛대 역할”을 했으면 했지 “투자 과잉과 수익률 악화를 초래한 주범”은 아니라는 반론이다.
2. 영진위는 운동권을 지원하기 위한 전진기지다?
감독협회가 영진위에 줄기차게 가하는 것 중 하나는 이념 공세다. 이에 몇몇 보수 언론들이 이를 부풀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1월24일 기자회견에 이어 30일에 또다시 감독협회는 성명을 냈는데, 여기서도 “지난 10년의 문화예술은 이념 선동의 수단으로 동원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과거 자신들은 영화진흥공사를 영진위로 “법까지 바꿔가며”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했는데, “DJ 정부의 이념적 전략과 그것을 등에 업은 몇몇 아류 영화인들의 동조로 결국 실현됐고, 자신들이 우려하던 바가 현실로 나타났다”고 썼다. 정인엽 감독협회 이사장은 1월31일 전화 인터뷰에서도 “현재 영진위 위원들의 면면을 봐라. 다 노사모 일색 아니냐”고 말했다.
영진위는 이와 관련해 “2003년 12월 영화감독협회가 주관했던 춘사영화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공로상을 주며 한국영화 부흥의 초석을 깔았다고 했던 건 뭐냐”며 “국회로부터 국정감사를 받고, 기획예산처가 주관하는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받아온 준정부기관”인 영진위에 대해 “정치권과의 결탁을 운운하는 것은 민주적 운영원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영진위의 한 위원은 “감독협회의 허무맹랑한 주장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면서 “법적 조치를 논의 중이다”라고 평했다. 한 제작자 또한 “감독협회 주장대로라면 소수의 영화인이 요직을 독점했다고 하는데 그건 요직이 아니라 봉사직”이라며 “영진위 위원을 무슨 밥그릇으로 여기는 오류는 이제 그만 범했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3. 영진위가 쓸데없는 조직들에 돈을 뿌렸다?
감독협회의 계속되는 영진위 흔들기가 실은 영화단체사업 지원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영화계 안팎에서는 보고 있다. 감독협회 또한 이를 전면 부정하지 않는다. 정인엽 이사장은 “영화제작에 지원해야 할 돈들이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피라미드식 조직들에 주어지고 있다”면서 “영진공 시절 지원 대상인 단체는 불과 14개였는데 이제는 157개나 된다. 여성영화인모임 등의 단체들에 도대체 왜 지원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감독협회가 주관하는 춘사영화제의 경우 고작 5천만원을 받았다”면서 “스크린쿼터는 없어진 거나 다름없는데 반미 운동을 하는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에는 1억5천만원을 주는 게 말이 되느냐”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반박 보도자료에 영화단체사업 지원 내역을 첨부한 영진위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14개 지원대상이 157개로 늘었을 만큼 영화계가 커졌고, 이들의 사업이 합당하다면 당연히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한 한 관계자는 “이것을 두고 영진위가 전횡을 저질렀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외려 영진위 관계자는 “특정 단체들만이 지원을 받던 공사 시절의 지원이야말로 문제가 아니냐”고 되물었다. 또한 영진위는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지원을 문제삼는데 감독협회는 스크린쿼터 축소에 찬성했고 지금도 그러는 것이냐”면서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정부 정책에 영진위가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고 해서 그걸 반미 선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고 밝혔다.
현재 영진위의 반박 및 명예훼손과 관련한 법적 대응 준비를 제외하면 영화계의 반응은 대체로 시큰둥에 가깝다. 영화인회의 관계자는 “근거없는 주장들에 대해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영화제, 영상위원회 등을 특정 세력이 독식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한 국제영화제 관계자는 “그들이 말하는 특정 세력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면서 “지금 영화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비판할 게 있으면 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짚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270여명이 소속되어 있다는 감독협회가 현재 활동 중인 감독들의 모임처럼 되어 있는데 그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참고로 현재 활동 중인 감독들의 대표적인 모임은 한국영화감독네트워크, 한국영화감독조합 등이다.
“괜히 나섰다가 신구 갈등이니 좌우 대립이니 할 게 뻔한데 그렇게 되면 영화계 전체가 욕먹는 일밖에 더 되나. 게다가 어떤 식으로든지 나서는 건 정권 교체 시기를 이용해 의도를 갖고 나서는 영화계 일부가 원하는 그림대로 따라가는 거다.” 지난 10년 동안 감독협회의 주장대로 “소수가 영화계를 독점”했다고 믿는 영화인들보다 “소수가 다수의 합의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발언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지금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영화인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은 자명해 보인다. 다만, 영진위 위원 구성과 관련하여 이 같은 ‘비생산적’ 시비가 또다시 일 수 있다. 한 감독은 “현재 감독협회 내부에서도 집행부의 성명 발표 등에 항의의 뜻을 표하고 탈퇴하려는 이들이 있다”면서 “다만 지금은 때를 보고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어떻게든 싸움을 하려는’ 쪽과 ‘되도록 싸우고 싶지 않은’ 쪽의 갈등 양상은 좀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영진위가 저지른 비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영화감독협회 정인엽 이사장 인터뷰
-영진위가 낸 반박 자료는 봤나. =신문을 통해서 봤다.
-감독협회는 먼저 좌파가 영진위를 독점했다고 했다. =좌파라는 말은 안 썼고. 언론에서 그건 그런 것이고. 우리는 특정 정치세력이 좌지우지했다는 거다. 우리가 성명내니까 문화관광부 관계자들은 환영하더라. 의심나면 가서 물어봐라. 영진위가 그 소속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거기 지배를 안 받는다. 문광부도 영진위에 별 관여를 못한다. 다른 정치세력이 관여하는 거지.
-영진위가 노사모 집단이라고도 했다. =안정숙 위원장도 열린우리당(대통합민주신당) 정책위의장의 부인 아닌가. 영진위 위원들 성분을 한번 조사해봐라. 우리는 예전부터 지적을 했다니까. 반대했는데도 정치권을 이길 재간이 있나.
-영화인들이 뽑았다고 봐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나중에 감독협회로 오라. 다 일러줄 테니까. 지금 바쁘다.
-질문 하나만 더 하자. 영진위 위원장이 정치인의 부인이다. 그 사실 자체가 큰 문제가 되나. 그로 인해 야기된 영진위의 문제가 뭔가. =우리가 과거 스크린쿼터감시단을 만들었을 때 개인 돈으로 했다. 그런데 저들이 감시단을 부숴버리고 스크린쿼터연대를 만들었다. 명계남이랑 문성근이가. 그리고 13억원을 썼다. 정부 돈을 갖고서 이른바 데모를 한 거다. 정치세력들이 정부와 짜고 말이다. 감시단 때는 우리 돈으로 했다. 그동안 우리는 이용당했다.
-잘 이해가 안 된다. 감독협회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에 참여했잖나. =스크린쿼터가 반미 운동으로 변질됐다. FTA 앞두고 반미 운동을 한 것밖에 안 된다. 영화단체들이 175개로 늘어난 것도 영진공이 영진위로 바뀌면서 조직화한 거다.
-원로 감독들의 생각이 다 그런가. =젊은 감독들도 많다. 감독협회 소속 회원 중에 젊은 감독들이 절반 정도 된다.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정초신도 왔고 민병천도 왔잖나. 이번에 영진위에 지원한 작품들을 다 밝히라고 했다. 그리고 80억원짜리 투자펀드를 해준 게 있다는데 그것 또한. 영진위처럼 돈 쓰면서 책임을 안 지는 곳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