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쯤 박혜명 기자는 뭐라 말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 홍보행사 참석차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인데 인터뷰 도중 존 터틀타웁 감독이 갑자기 불법복제에 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해적판의 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농반진반 기자들에게 당신들도 불법복제를 하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고 한다. 듣기에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다운로드받아서 영화 보는 일이 다반사인 게 국내 실정이다보니 뭐라 답할 말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몇년 전부터 중국이나 동남아를 다녀온 이들이 이구동성 “거긴 해적판 천지”라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미국 감독의 그런 발언도 당연한 일이다. 중국에선 주로 VCD로, 한국에선 주로 인터넷으로 유통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명장>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진가신 감독은 비교적 한국을 잘 아는 홍콩 감독이다. <명장> 시사회에서 무대 인사를 하던 그도 불법복제 얘기를 꺼냈다. 이미 불법파일로 이 영화를 본 관객이 많다는 걸 아는 진가신 감독은 불법파일로 본 버전과 극장용 버전이 다르다고 힘주어 설명했다. 점점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고 있고 그래서 극장에서 봐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대작을 만들었다며 극장을 찾아줄 것을 간청했다. 해적판의 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영화 관계자들의 입장은 그렇게 그저 관객에게 부탁하고 호소하는 것 외에는 없어 보였다.
알다시피 한국 영화산업은 해적판으로 치명적인 내상을 앓고 있다. 부가판권시장이 몰락하면서 극장에서 몇 백만명이 보지 않으면 제작비를 회수할 길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몇 만명 혹은 몇 십만명이 찾는 영화는 제작비를 건질 가능성이 없어 점점 투자가 어려워지고 도박판처럼 크게 한방을 노리는 영화만 제작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전체 수익률이 악화되는 건 물론이고 영화의 다양성도 기대하기 힘들다. 영화계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여러 가지 처방이 필요하지만 그중 중요한 것이 불법복제에 대한 대응일 것이다. 최근 불법복제를 없애자는 캠페인을 자주 접하게 된 것도 영화계의 절박한 필요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캠페인만으로 부가판권시장이 되살아날 수는 없다. 불법 다운로드를 받지 말자는 당위가 보고 싶다는 욕망을 이기는 경우는 현실에서 흔치 않다. 지난해부터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씨네21>은 이 문제에 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 결과 온라인에서 영화의 합법적 유통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지난 1월21일 설명회를 열었다. 동영상 디지털 유통을 책임질 <씨네21>의 자회사 씨네21아이도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즐감’이라 이름 붙인 다운로드 서비스는 2월경 오픈할 예정이다. 다운로드를 받고 결제창이 뜨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면 된다. 돈은 서비스 제공자와 저작권자에게 돌아가므로 관계자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당장 모든 영화를 이렇게 볼 수 있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렇진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서 합법적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영화들이 많아질 텐데 그러자면 중요한 것이 어떤 공감대다. 이렇게 하면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좋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모여 참여하는 이가 많아지면 그만큼 빨리 많은 혜택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하는 사업을 자화자찬하긴 쑥스럽지만 나는 이런 서비스가 너무 반갑다. 해적판 천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싶고 영화산업이 건강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그런 마음일 것이라 믿는다.
P.S. 설을 맞아 합본호를 내고 한주 쉬게 됐다. 즐겁게 읽을 기사들을 많이 마련했고 독자들께 드릴 선물도 준비했다. 즐거운 설 연휴를 맞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