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정신적 성숙 진도가 남들보다 늦다고 느껴왔다. 민법상·형법상으로 완전한 법적 성인이 된 뒤에도, 하굣길의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의 껍데기를 가지고 저들의 친구들 중 하나로 돌아간다면, 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조금 더 나아가면, 내 알맹이는 어린 시절 그대로인데 어울리지 않는 어른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 맛이 간 착각도 해보고. 이쯤 되면 병원에 가봐야 하나? 의사선생님이 ‘어릴 적 혹시 자라 보고 놀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중학생 때 본 영화 <빅>의 잔상이 남아 있다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놀이공원의 소원성취 기계에 소원을 빌어 무늬만 어른이 된 소년. 주인공 톰 행크스가 스스로 돈을 벌어 꾸민 자신의 방은 그 당시 내가 꿈꾸던 그대로였다. 운동장만한 원룸에 넘쳐나는 꿈의 장난감들, 돈을 넣지 않아도 먹고 싶은 음료를 언제든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 2층 침대, 그 옆에 놓여 있는 텀블링. 주인공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고 그의 방에까지 찾아온 여주인공에게 바로 그 텀블링을 태워주었다. 유치찬란한 동심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그 장면은, 내가 어른이 된 뒤에 다시 보았을 때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뭐, 이성을 공략하는 괜찮은 작업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느끼고 싶은 마음. 감독은 ‘순수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영화는 꽤 공감을 유발하는 소재를 가지고 흥미롭게 진행되지만 결국 결말은 예상대로 간다. 아니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 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직장생활, 그리고 역시 그 덕에 자신에게 매력을 느낀 여자친구. 여기까진 좋았는데, 반대로 어른의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잃어가는 동심. 늘 이게 문제다. 그는 결국, 여전히 열세살인 가장 친한 친구를 매개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주 단순한 결말 같지만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체성을 명확히 해줄 명쾌한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은 지금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적어도 어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아이는 아니겠구나 하는 결론이 나온다. 순수한 마음이나 동심을 가지고 있는가 등의 문제를 떠나, 결정적으로 나에겐 그 시절로 돌아갈 용기가 없다는 거다. 영화 속 주인공보다 훨씬 더 깊이,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나는 어른의 생활에 익숙해져버렸다. 어린 시절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들과 ‘우린 변하지 말자’며 빨간 쭈쭈바를 서로 나눠 먹고 굳은 약속을 했을 때 그건 진심이었다. 이 무리 중 적어도 나만이라도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나지 않게 된 친구들은 내 기준에서 변한 친구가 되었고 나 자신은 변하지 않았다는 주문을 외웠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나이를 먹고, 성장하고, 경험하고, 상처받고, 철이 들고, 가지고 있던 걸 잃어버리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걸 소유하기도 하며, 주어진 환경과 타협하며, 어찌됐든 변화하는 존재라는, 너무나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이야. 바보인가?
변하지 않은 것들도 분명히 있다. 여전히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고, 집에 자판기를 들여놓고 싶고, 텀블링이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유치찬란한 상상을 자주 한다는 것.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나와 비슷한 증상을 앓고 있는 남성 환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게 아닐지.
그나저나 걱정이다. 죽은 것도 아니고, 멀리 떠난 것도 아니고, 멀쩡히 존재하지만 13살 소년으로 돌아가버린 남자친구를 둔 여주인공의 마음은 누가 헤아려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