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춘자란 캐릭터가 이보영이란 배우와는 선뜻 부합하지 않는 느낌이더라. =그전에는 워낙 고운 여자들을 연기했으니까. (웃음) 하지만 춘자는 단순한 속물인데다가 백치미까지 있는 여자다. 보통 이런 여자들은 감초 역할을 하지 않나. 아무래도 전면적인 여자주인공으로 나오기는 힘든 캐릭터일 것 같았다.
-이전에 출연한 작품과 비교해서 연기하기에 어떤 재미가 있던가. =감정의 기복에 엮일 필요가 없다는 게 즐거웠다. 아무래도 예전에는 기복이 심해서 연기를 하지 않을때도 우울한 적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아예 단순하고 명쾌했다. 마음도 편안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점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과도한 액션은 아니지만, 액션연기 때문에 운동도 배웠다고 들었다. =사실 대역도 많이 썼다. 아무래도 내가 힘이 달리다 보니까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더라. 복면을 쓰고 나오는 장면도 많았고. (웃음) 그래도 신재명 무술감독님한테는 “액션배우로서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자세는 좀 예쁘게 잘 나왔거든. 연결동작이 전혀 되질 않았을 뿐이지. 사실 평소에 운동을 정말 싫어한다. 감독님도 사무실에 이야기해서 액션배우로 키워보겠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포기하시더라.
-촬영현장에서는 어떤 스타일의 배우인가. 홍보사가 뿌린 보도자료에는 ‘보영이 형’으로 불렸다던데. =아니야, 나 그렇지 않아. 저 팀 왜 저래 진짜…. (웃음) 나 진짜 오래 먹고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게 다들 나를 새침하거나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 보면 아니니까 나온 말이다. 난 전혀 남자같은 여자가 아니다. 물론 여자들한테는 편하게 대하는 게 있다. 하지만 보통 남자들은 나를 감당하기 어려워 한다. 직선적이고 말을 잘 돌려서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는 남자들이 종종 있다. 왠지 지금 나를 그렇게 몰고 가려는 것 같아서 불안하다. (웃음)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 가운데 가장 멜로에 대한 집착이 덜한 작품이다. 본인도 그 점이 편했을 것 같은데.. =사실 내가 멜로연기를 정말 못한다. <미스터 굿바이>에서는 다들 칭찬해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재욱 오빠가 잘 받아주니까 가능한 거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냥 평범하게만 살아왔다. 격한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바닥을 쳐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확 올라간 적도 없으니까. 내가 만약 심한 짝사랑을 앓아봤거나 사랑에 된통 데어봤으면 멜로연기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연애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있을 것 아닌가. =내가 매우 덤덤한 편이다. 연애할 때도 애교가 많거나 확 빠지거나 그러지 않는다. 생각이 많고 신중한데… 그러면서 즉흥적이지. 아무튼 돌다리를 많이 두드리는 편인데, 아니 그렇지 않아. 많이 ‘덥석 덥석’ 그러는데… 나도 내 성격을 잘 정의하지 못하겠다. (좌중 웃음) 아무튼 격정적인 멜로연기는 잘 못하겠다. 같이 일했던 감독님들도 이제는 내가 멜로연기를 얼마나 못하는지 다 안다. (웃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미스터 굿바이>의 복자로 이보영을 기억한다.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이기도 했고. 지금 생각해봐도 감회가 클 것 같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닌가. 지금도 복자를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아프다. 그애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기분이 우울해진다.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좋았던 것도 내 일상까지 즐겁게 해주었다는 점이 가장 컸다. 복자랑 춘자는 정말 많은 면에서 다른 것 같다. 복자는 계산도 없고 순수한 애인데, 춘자는 계산이 많아서 얄밉게 보이지만 머리가 안 돌아가서 귀엽게 보일 수 있는 캐릭터인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미스터 굿바이>를 보면서 이보영이나 안재욱이나 모두 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끊임없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나, 애교를 부려도 먹히지 않는 장면에서는 어떤 NG가 났을지도 궁금하던데. =처음에는 왜 얘네들은 이렇게 쓸데없이 말이 많을까 싶었지. (웃음) 하지만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인 이상 쉬운 게 없었다. 나는 현서가 죽는다는 사실을 14부쯤에서야 알았다. 이보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복자는 모르니까 그게 정말 힘들었다. 둘이서 같이 냉면을 먹는 장면이 있는데, 현서는 심장수술을 해서 오이를 먹으면 안 되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복자가 오이를 다 가져와서는 “그래 그래, 이거 내가 다 먹고 나 혼자 오래 살 거다” 이러면 현서가 “그래 너는 오래 살아라”라고 말하는 장면인데, 그 장면을 정말 웃으면서 연기하기가… 어머, 나 지금도 눈물 나려고 그래. (웃음) 촬영하는 동안 다음 작품을 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연기의 감동이 이런 거구나 싶었지만, 빠져나오기는 정말 힘들었으니까.
-어느 인터뷰에서 복자가 자신이랑 가장 비슷하다고 했었다. 춘자와 비교해보면 어떤가. =연애하는 방식을 제외하면 복자랑 비슷한 면도 있는 것 같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런 연애는 힘들어 보이기만 하더라. 하지만 연애하는 방식을 빼놓고는 복자를 연기하는 게 편했다. 애교가 없는 나처럼 애교를 부려도 먹히지 않는 여자니까. 하지만 솔직히 춘자가 더 편했던 것 같다. 일단 때도 묻어 있고, 워낙 현실적인 여자 아닌가. (웃음) 복자 같은 여자는 남자들은 정말 좋아하겠지만, 막상 실제로 그런 여자가 옆에 있으면 소중한 걸 모를 수 있다. 남자들도 좀 못된 여자를 좋아하지 않나? 내 손에 잡히지 않고 튕기는 여자들에게 매달리잖아. (여자들도 그렇지 않냐고 하자) 그렇지. 사실 나도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 말 잘 듣는 남자는 너무 재미없다. 말 안 듣는 남자가 가끔 내 말을 들을 때의 쾌감이 장난이 아니다. (웃음) 그런데 사실 나는 내가 리드하는 게 싫다. 오히려 리드를 당하고 싶은 데, 그런 내 캐릭터를 잘 잡아주는 사람이 많지가 않은 것 같다. 참 내가 생각해도 너무 럭비공이야. (웃음)
-나이 이야기를 꺼내니 굳이 물어보겠다. 찾아보니 스물여섯에 데뷔를 했고, 올해 서른이더라. 일반적인 여배우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데뷔했는데 불안하지는 않았나. =별로 그런 건 없었다. 솔직히 지금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톱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 배우 일을 시작한 건, 뭐랄까 일종의 취업 같은 의미였다. 아, 이 직업은 내가 잘만 하면 명퇴없이 갈 수 있겠구나. 이런 거였지. 나이가 들면 든 대로 내 나이에 맞는 배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월급받듯이 꾸준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제나 근면성실하게 일하려고 했다. 잘리지 않으려고. (웃음)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승진의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 않을까. =그런 건 없다. 다만 전에는 한정적인 이미지의 캐릭터만 들어왔는데, <원스 어 폰 어 타임>을 계기로 이보영에게도 이런 면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래서 영화 만드는 분들이 나를 좀더 다양한 시각으로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일단은 영화가 좀… (’잘됐으면 좋겠다?’라고 끼어들자) 아니. 어차피 잘 안 돼도 관계자들은 다 볼 것 아닌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