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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동사서독>
2008-01-18

외로웠고 그래서 사랑하고 싶었으니까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동사서독>

1997년 봄날은 그랬다. 대학 졸업반이었고, 졸업하고 뭘 해야 할지,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지 대책은 전혀 없었고, 몇번의 연애는 참담하게 막을 내렸고, 가난했고…. 하지만 세상은 환했다. 나는 일본식 기와집 이층에 방을 빌려 살고 있는 하숙생이었다. 신문지 크기만한 격자 창문이 길을 향해 나 있었다. 하숙집 마당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벚나무들은 봄날 햇빛 속으로 은빛 꽃잎을 화르르 뿌려댔다. 골목 담장에는 개나리가 미친 듯이 피어 있었다. 낮이면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에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가끔 골목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내 이마를 툭 치고는 달아났다.

어쩌다 도서관에 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정기간행물실에서 <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현대문학> <현대시> <실천문학> <세계의 문학> <작가세계> <현대시> <한국문학>…. 문예지에 실린 시들을 모조리 복사해 가져왔다. 창가에 기대 하루 종일 그것들을 읽어댔다.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마음에 드는 시는 노트에 옮겨 적었다. 스물다섯살이었고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편씩 시를 쓰곤 했지만 시 같은 시를 쓴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을 보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우체국 직원이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독신녀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다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테이프가 다 감기고 스탭의 이름이 올라 갈 때 진공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는 것을 기억한다. 주위의 모든 것이 먹먹했다. 심장은 가파르게 뛰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 창가로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벚꽃과 개나리 속으로, 햇빛 속으로 한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찬란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시를 썼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의 시였다.

“아주 짧았던 순간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된 적이 있다/ 봄날이었다. 나는 창밖을 지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는데// (…) // 그 짧았던 순간 동안 나는 그만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여자를 사랑해 왔던 것처럼// 햇빛이 개나리 여린 꽃망울을 살짝 뒤집어/ 개나리의 노란 속살을 엿보려는 순간, 그 여자를 그만 사랑하게 되어서.”

그리고 며칠 뒤, 배낭을 챙겨 여행을 떠났다. 여수 부근을 며칠 떠돌다 비금도라는 섬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섬 귀퉁이의 어느 여관에 들어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1994)을 보게 되었다. 아, 장만옥! 그녀는 복숭아 꽃잎이 난분분 날리는 어느 봄날의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턱을 괴고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술한 창문 틈으로 밀물 드는 소리가 아득하게 밀려왔다.

“그와 혼인했을 줄 알았는데 왜 하지 않았소?” “날 사랑한다고 말을 안 했어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있소.”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여관방에 엎드려 시를 썼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의 ‘그’와 <동사서독>의 장만옥을 만나게 해야 했다. 왠지 그래야 했다. ‘그’는 어느 먼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왔고 장만옥은 바닷가의 어느 여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이들은 낡은 여인숙에서 만나 속절없이 사랑을 나눠야 했다. 그들은 비린내 나도록 외로운 사람들이었으니까. 이틀 동안 그 여관방에서 <밀물 여인숙>이라는 연작시 3편을 만들었고 얼마 뒤 그 시로 등단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그 장면들, 그 시들은 완벽한 신파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이지 사랑이라는 걸 하고 싶었다. 아무나 붙잡고 나랑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외로웠고, 외로웠고 또 외로운 그런 날들이 있는 것이다. 이유 따위는 묻지 말기를. 우리를 외롭게 하는 일은 널려 있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넘쳐나니까. 그리고 나는 스물다섯살이었고 시를 쓰고 싶었고 게다가, 게다가 봄날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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