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연기하는 레프트백 김혜경은 대표팀에서 가장 이성적인 선수다. 일본에서 실업팀의 감독 겸 선수로 뛰다 대표팀의 감독대행으로 불려온 김혜경은 곧 경질되지만, 명예회복을 벼르며 끝까지 선수로 대표팀에 남는다. 협회는 그녀의 이혼 경력을 문제삼기도 하고, 신임감독 엄승필은 자신의 옛 남자친구라 껄끄럽기도 하지만 좀체 흔들리지 않는다. 빚에 쪼들려 전전긍긍하는 친구 한미숙 등과 비교하자면, 대표팀 내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넉넉한 선수이긴 하지만 그녀 역시 남모르는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 슬픔은 핸드볼에서만큼은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망과 겹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생 라이벌이자, 넘지 못할 벽이었던 미숙을 이기기 위해 언제나 2배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 그녀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미숙을 보듬어주는 처지가 된다. 선수로서의 경쟁심도 이제는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한 눈물과 우애로 변한다. 그렇게 혜경은 강한 여자다. 지금껏 김정은이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다.
-선수들 중 처음부터 혜경 역할이 탐났었나. =물론. 배우라면 누구나 해보지 않은 역할에 대한 욕심이 있겠지만 처음부터 눈에 들어온 게 혜경이었다. 실제로 나 역시 혜경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지내왔고 살면서 큰 어려움없이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고민이나 슬픔이 없는 건 아니다. 혜경도 나처럼 신세지는 거 싫어하고 ‘힘들어, 봐줘’ 뭐 그런 얘기를 선천적으로 잘 못하는, 그러니까 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다. 폭발하는 장면도 별로 없고. 그래서 정서적으로 많이 끌렸던 것 같다.
-중심인물 중 유일하게 첫 핸드볼 장면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나에게는 끔찍한 오프닝이었다. (웃음) 다른 친구들처럼 땀 흘리며 경기하면서 자연스레 등장하면 좋은데, 나만 스포트라이트받으면서 짜잔하고 등장해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혜경의 캐릭터에 더 집중하게 만들긴 했지만, 다른 아줌마들과 달리 고고한 학처럼 ‘오늘부터 내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어쩌고 하면서 우아하게 등장하는 게 좀 그랬다. 그래도 완벽한 인간은 없지 않나. 동료들과 함께 미경의 보약을 훔쳐 먹은 게 들켜서 함께 서 있을 때, ‘너는 정말 안 그럴 줄 알았다’는 미경의 얘기를 듣는 장면은 너무 좋고 사랑스럽다.
-핸드볼 장면 촬영 도중 부상까지 당한 걸로 아는데, 촬영이 어느 정도로 힘들었나. =<사랑니>에서 입시학원 수학강사로 나왔는데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미분 적분을 공부하면 더 잘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웃음) 촬영 전에 핸드볼 연습을 하면서 꽤 준비를 많이 했다. 남친인 이서진씨가 또 운동광이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특별히 개인지도도 많이 해줬다. 그런 훈련의 결과였는지, 촬영장에서 내가 무슨 동작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해줬다. 그러다 방심한 거다. 심지어 촬영 때가 아니라 마지막에 테스트 촬영하다가 다쳤다. 골반을 다쳤는데 너무 안 좋아져서 결국에는 진통제를 맞으면서 촬영했다. 이러다가 촬영 끝나면 다리를 절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 모습이 영화에서 보일 때면 기분이 좀 안 좋다.
-임순례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배우들이 고생했다는 얘기가 많이 들리던데. =하하. 고생했다는 얘기는 거의 장난으로 얘기하고 다닌 거다. 그만큼 감독님과 편했다는 얘기다.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님도 그랬지만, 김정은이라는 배우가 좀더 현실적으로 땅에 발을 붙일 수 있게 해주셨다. 그전부터 영화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어가고 있었는데, 임순례 감독님도 그런 만족감을 줬다.
-<사랑니> 때와는 달리 중심인물이 많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겠다. =맞다. 아무래도 <사랑니> 때는 정지우 감독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이번에는 배우들이 많아서 감독님을 독점하지는 못했다. 감독님의 사랑을 좀 덜 받아서 외로웠다는 게 차이점이라고나 할까? (웃음) 전에 황정민 오빠가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 얘기를 해주면서 임순례 감독님이 무척 섬세하고 디테일도 굉장히 구체적이라고 얘기해줬다. 사실 그런 식의 작업을 많이 해보지 않아 무섭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촬영을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니까 몰래 쪽지를 써서 주셨다. “정은씨 잘하고 있으니까, 눈을 감고 숨을 쉬어보고 기를 아래로 내려보도록 심호흡을 한번 해봐요”라고 써 있었는데 괜히 눈물이 핑 돌더라. 게다가 감독님은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스타일인데 핸드볼 장면을 촬영할 때는 마이크를 잡고 크게 소리를 쳐야 해서 감독님도 힘들었을 거다.
-<우생순>은 <사랑니>에 이어 이른바 ‘코미디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와 동떨어져 있는 두 번째 영화다. =<사랑니>는 감히 내 연기 인생의 한 챕터를 넘겨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어 저 사람한테 저런 면이?’ 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 때 참 기분이 좋다. 그 사람을 더 신뢰하게도 되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만 발견하지 말고 나도 한번 발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던 영화가 <사랑니>였고 <우생순>도 어쩌면 그런 생각의 연장이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이렇게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녀도 워낙 <사랑니>를 안 본 사람들이 많다보니 참 애로사항이 많았다. (웃음) 그런데 <우생순>은 사람들이 많이 볼 것 같아서 그때의 억울함이 좀 가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한국 영화계의 여배우로서 조금씩 더 나이를 먹고 있다는 생각도 그런 변화의 중요한 이유인가.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거다. 물론 이전 코미디영화 경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더이상 내가 깜찍하지도 않은 것 같고(웃음), 계속 이런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작업을 하던 분들과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동시에 그런 분들도 나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아까 얘기했던 대로, 서른살 넘고 그러면서 나를 사랑하자는 생각이 문득 든 거다. 사랑을 담아 한 연기니까 거짓이 담기면 안 된다. <우생순>이 내 연기의 두 번째 챕터라면 곧 또 세 번째 챕터를 써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