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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신화적인 두 미국 인민의 초상

미국이 그리워하는 두개의 신화- 자수성가형 사업가와 청렴한 공직자- 가 발산하는 매혹 <아메리칸 갱스터>

엉뚱해 보이는 얘기부터 해보자. 내가 올해 본 가장 뜨거운 연설은 12명의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 중 한명이 아니라 영화 <올 더 킹즈 맨>의 시골뜨기 윌리 스탁(숀 펜)이 했다. 자신이 도시세력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깨달은 루이지애나 주지사 후보 윌리 스탁은 단상에 오르자 준비해온 점잖은 연설문 쪽지를 집어치우고 즉흥적으로 이렇게 선동한다. “이 멍청한 촌뜨기 양반들아, 내 말을 들어요. 나만 촌뜨기가 아니라 여러분도 촌뜨기요. 그들은 나를 수천번 속인 것처럼 당신들도 속였소. 하지만 이번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겠소. 이번에는 그들이 당할 차례요.” 핏대를 올린 그의 막말은 분노로 곡괭이를 치켜든 농부의 함성 같은 것이어서 먼지 뒤집어쓰고 그 말을 듣던 현지의 촌부들은 당장이라도 이 촌뜨기에게 한표를 던질 태세고, 그는 결국 멋지게 주지사가 된다. <올 더 킹즈 맨>의 나머지는 대개 시시하지만 이 연설 장면만큼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유효한 대중 퍼포먼스 중 하나가 연설이며 그 힘을 제대로 악용한 이가 히틀러다. 하지만 연설의 연출은 세계 어떤 영화사를 통털어도 할리우드가 영화에서 가장 잘한다. 합의에 이르는 감동적 도출, 이게 실은 연설의 핵심인데, 그걸 구조적이며 장르적으로 끌어내는 건 할리우드의 유능한 기술이다. 흥미진진한 할리우드 법정 드라마는 연설의 장르화에 다름 아닐 정도다. 링컨의 연설, 케네디의 연설, 마틴 루터 킹의 연설, 말콤 엑스의 연설, 알리의 연설, 그것들에 대한 미국의 존중의 역사는 강하며 때때로 우리도 들어 알고 있다. 중요한 건 거기에 자주 인민주의자, 평등주의자, 개척주의자로서 너와 나의 동참과 인정에 관한 미국적 신화가 깃든 점이다. 그 점에서 <올 더 킹즈 맨>의 연설장면은 확실히 촌놈 스미스씨가 워싱턴 국회로 쳐들어가 24시간 국회를 장악했던 프랭크 카프라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의 저 유명한 연설장면을 상기시킨다. 윌리 스탁이 스미스의 후손으로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메리칸 갱스터>를 말하려다 이 얘기가 떠오른 건 이 영화의 두 주인공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와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가 마주 앉은 마지막 장면을 비로소 다시 생각했을 때다.

연설을 대체한 합의가 의미하는 것

<올 더 킹즈 맨>의 감독은 <아메리칸 갱스터>의 각본가인 스티븐 자일리언이다. 그리고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텍스트의 진짜 주인은 아무래도 스티븐 자일리언인 것 같다. 리들리 스콧이 미국 사회사에 관한 몇몇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그는 이런 관심사에 일관성을 갖지 않는다. 반면 스티븐 자일리언은 <쉰들러 리스트>, <갱스 오브 뉴욕>, <시빌 액션>(나머지 두 영화에 비해 좀 덜 알려져 있을 이 영화의 내용은 산업폐기물로 생수를 오염시킨 기업에 맞서 평범한 주민과 일개 변호사가 용감히 맞붙어 싸워 마침내 승소한다는 내용이다)에 이르기까지 시민과 평등과 개척의 미국에 관해서 때로는 깊은 성찰을, 때로는 도착적인 결론을 맺으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각본가이자 감독이다. 거기에는 대체로 주인공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합의의 연설 혹은 그와 유사한 강렬한 제스처가 있다. 그런데 <올 더 킹즈 맨>을 연출한 방식에 비해 그가 쓴 <아메리칸 갱스터>의 각본에는 그런 역동적인 장면이 이상하게도 없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마지막 장면은 오히려 좀 싱겁다. 실화 때문이라면 이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프랭크와 리치의 캐릭터에는 실화를 뛰어넘는 많은 부가적 상상이 추가되었을 게 뻔하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 연설이 합리적으로 설득을 끌어내기 위한 상연이라면, 설득이 필요없는 관계에서 그 절차는 필요없을 것이다. 그때는 간단히 합의만 하면 된다. 프랭크와 리치는 서로 간곡한 설득없이 간단명료하게 합의한다. 영화 내내 만나지 않으면서 우리의 궁금증을 증폭하더니 만나서는 고작 몇 마디 건네다 말고 서로 동의해버린다. 클라이맥스를 이런 식으로 구성함으로써 힘이 빠질 위험이 있는데도 영화는 끝내 그걸 택한다. 뒤이어 이어지는 장면들, 프랭크의 출옥과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다음 총소리와 함께 보이는 프랭크의 실루엣은 아마 사족일 것이다.

70년대 할렘가 뒷골목을 지배한 거대 마약상 프랭크와 그를 쫓아 체포하고 다시 그를 변호해준 리치 로버츠의 아이러니한 관계가 실존했던 것이기는 해도 이 마지막장면의 싱거움은 영화적으로 뭔가 궁금증을 낳는다. 왜 이 순간 서사적 강도를 일부러 낮춘 채, 두 사나이의 대면에 있을 만한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약화한 것일까. 물론 그 순간 프랭크가 할 수 있는 건 리치의 제안을 받아들여 형량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었을 테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란 비즈니스맨으로서 프랭크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냉정한 거래의 과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왜 끝내 한 사람이 패하고 또 한 사람이 승리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인가. 둘 다 지지 않은 것 같은 느낌 혹은 서로 이긴 것 같은 거래의 합이 여기에 있다. 아니 프랭크가 벌을 받은 것이라고는 해도 왜 우리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일까. 프랭크 루카스가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고 정말 느껴지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설득의 대상은 영화 속 서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것이다. 실은 여기에 연설의 장면은 없어도 효과는 있는 셈인데, 그들의 거래는 거래를 가장한 합동연설의 장처럼 보일 정도다. <올 더 킹즈 맨>에서 윌리 스탁의 연설의 효과가 그와 그걸 보는 영화 속 청중을 거치고 난 다음 관객인 우리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티븐 자일리언은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영화 속 청중의 자리를 배제하고 우리의 반응을 곧장 겨냥한다. 예컨대 영화에 흔히 있는 법정에서의 열띤 연설 공방과 그걸 듣는 배심원들의 장면은 <아메리칸 갱스터>에 없다. 영화는 그걸 건너뛰며 차라리 둘의 합의를 보는 우리 객석이 이 합동연설의 진정한 반응 숏이 되기를 원한다. 프랭크 루카스가 지어 보이는 그 환한 웃음. 우리는 무엇에 관한 합의를 교묘히 요청받은 것인가.

<아메리칸 갱스터>는 미국 사회를 해부하는 영화인가

주인공 프랭크를 능수능란한 월스트리트의 비즈니스맨으로 놓고 이 영화를 미국 경제사의 비유로 이해하려는 해석들을 본다. 틀리지 않은 말이며 실제로 영화는 일부 그렇게 완성됐다. 마약이라는 프랭크가 다루는 상품의 사회·윤리적 불법성만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의 사업은 한치의 오차 없이 보스였던 구세대 마약상 범피 존슨이 그토록 혐오했던 현지 직송, 대량 공급이라는 신세대 기업 방식의 도래를 의미한다. 거대 마피아 조직을 상대할 때, 연예인에 가까운 다른 흑인 갱을 훈계할 때, 그의 냉철한 기업가의 면모도 드러난다. 그러나 <아메리칸 갱스터>는 비즈니스맨의 서사로만 완성된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명백히 프랭크가 이 영화의 큰 부분을 끌어가는 주인공임에도 리치가 한쪽에서 평행하게 달리지 않으면 이 영화는 아마 전혀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심지어 리치 역을 맡은 러셀 크로가 프랭크 역의 덴젤 워싱턴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의견도 내 주변에서 나오는데, 동의 여하를 떠나 의미있는 반응이다). 비교적 양적으로 부족해도 리치의 이야기, 청렴결백한 공직자의 스토리가 중요하게 한편으로 흐른다. 이 점이 <아메리칸 갱스터>의 흥미로운 구조를 이룬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가 경제사를 넘어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의 미국 사회의 전면을 해부한다는 의견도 있다. 여기에는 프랭크가 유년 시절에 겪은 흑인 인권 차별의 문제, 암흑세계에서조차 백인의 지배 아래 있는 흑인 세력의 평등권 문제, 미국이 저지른 베트남전의 죄악을 역공한 것 같은 느낌의 프랭크의 행적(프랭크는 군인들의 유해가 실린 관으로 마약을 들여온다)이 근거가 된다. <아메리칸 갱스터>가 과연 당대의 미국적 상황에 얽힌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실존의 인물(프랭크)과 그 인물의 설정에 따라 조금 더 부풀려졌을 인물(리치)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당대의 틈새를 재구성한다. 그런데 궁금증이 이는 것은 여기다. 이 영화를 어두웠던 미국의 사회적 거울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가 좀 망설여진다. 우회적인 반영을 제대로 못해서가 아니라, 실은 그것이 이 영화를 흥미롭게 하는 핵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미국을 비판하거나 해부하는 영화인가. 혹은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비유적으로 일깨우는 영화인가. 혹은 그와 유사한 정서적 충격을 전해오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오히려 여러 방식의 어떤 매혹들이 깃들어 있다. 인물들에 대한 매혹에서부터 그 인물을 미국 시민으로 상정할 때 버릴 수 없는 매혹까지 두루 어른거린다. 그 매혹을 놓친다면 이 영화는 재미없다.

전형적인 부패형사를 두고 평행하는 두 주인공

<아메리칸 갱스터>는 두 사나이의 이야기를 유례없이 영화의 거의 끝까지 평행으로 전개하며, 접속 또는 교차시키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 둘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조역 하나가 등장하는데, 뉴욕 특수수사대원이자 부패한 형사 트루포다. 지나치기 쉽지만 이 인물이 하는 역할이 주제적으로나 구성적으로 중요하다. 뒷돈을 요구하니 프랭크에게 트루포는 사업의 걸림돌이고 부패한 공직자이니 리치는 트루포를 언젠가는 잡아넣어야 할 쓰레기로 본다. 프랭크와 리치는 트루포라는 인물을 사이에 놓고 유사한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다. 서서히 리치가 프랭크를 쫓는 구조로 옮겨가지만, 실제로 프랭크와 부딪치는 건 트루포이고, 리치와 겨루게 되는 것도 트루포다. 프랭크와 리치는 각자 자기의 영역에서 트루포와 맞서 싸운다. 리치가 마침내 잡아넣을 명단을 요구했을 때 프랭크가 트루포를 포함해줄 것을 요구하는 건 그러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프랭크와 리치에게 공적이 있다면 그건 트루포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공적을 통해 우리가 프랭크와 리치가 그다지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사이가 아니라는 걸 시종일관 직감하게 되며, 둘의 만나지지 않는 이야기에 관해 불평할 이유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은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그런데 두 인물을 이어주는 서사상의 교량이라는 역할보다 트루포가 하는 좀더 중요한 역할이 있다. 트루포가 지나치게 전형적인 악인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걸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 점은 우리로 하여금 프랭크와 리치를 다른 식으로 보게 하는 효과를 낸다. 트리포의 악랄함이 지나친 전형성으로 강조되는 동시에 그를 상대하는 프랭크와 리치의 악인으로서의 면모는 희미해지고 있으며 그 둘은 악인의 그늘을 벗어나 존중받을 만한 어떤 인물로서 강조된다.

실은 프랭크가 더 악인이다. 악하기로 치면 트루포보다 몇배 더할 것이다. 헤로인으로 수많은 흑인의 생을 파괴하고 더러는 살인도 일삼았으니 그의 악행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프랭크를 악인이라 생각하며 트루포와 같은 급으로 놓고 혀를 차지 않는다. 아니 프랭크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그의 비범한 사업가적 수완은 둘째치더라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곗바늘처럼 생활하는 그의 절제된 생활은 그의 악행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덮어버릴 만큼 캐릭터로서 장악력이 있다. 매혹적인 건 그가 사는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프랭크의 종교적인 삶의 방식 자체다. 마약은 중요치 않고 그걸 다루는 프랭크의 방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초라한 할렘가의 해결사 하나가 헤로인 시장을 장악하는 사업가로 격상해간 성공신화에 매혹을 지니고 있다.

리치도 실은 악인이다. 아내와 다투며 길을 걸을 때조차 유모차를 몰고 가는 한 여자와 의미심장한 눈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면 그는 그 유부녀와도 아내 몰래 잤을지 모른다. 생활은 개차반이고 여성편력은 화려하다. 그럼에도 그가 나쁜 놈인가 묻는다면 확신이 가지 않는다. 리치를 악인의 인상에서 구해내는 것은 그의 정직한 집념이다. 열 중 아홉이 나쁘다 한들 그것 하나만으로도 리치는 매혹적이다. 어떤 다른 짓을 해도 리치는 부패만큼은 저지르지 않는 청렴결백한 공직자다. 그리고 트루포는 정확히 리치의 그 증거물이다. 리치에 대해 느끼는 매혹은 그가 한 가지만 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프랭크와 리치의 관계를 흥미롭게 하는 건 그들이 대구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남편과 아들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질인 프랭크와 가장으로서 무절제하고 엉망이지만 사회적 인간으로서는 숭고한 리치. “마약업자의 일상이 자네하곤 딴판이군, 리치”라고 누군가는 말한다. 게다가 둘의 장단점의 대구는 크게 비대칭이다. 그런 점에서 프랭크에게 없는 미덕 한 가지를 리치가 갖고 있고, 리치에게 없는 아홉 가지 미덕은 프랭크가 갖고 있다.

흔히 두 사나이의 매혹적인 대구 관계를 말할 때 마이클 만의 영화를 떠올리지만 <아메리칸 갱스터>의 구도는 그것과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마이클 만의 두 사나이들은 적어도 비등한 밀도를 갖춘 인물들이거나 정확히 선과 악을 대변하는 대립각의 상징자들이다. 그 세계에서 비대칭의 아이러니는 매력이 되지 않는다. 둘은 대결하거나 시종일관 협력자로서 붙어 있어야 하는데 구 대 일과 일 대 구의 비율은 관계의 긴장감을 망가뜨릴 염려가 있다. 이런 비대칭이 매력이 되는 두 사나이들의 세계란 실은 따로 있으며 때때로 그건 우스꽝스럽게 처리되어온 것이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오랫동안 대중적으로 크게 사랑받아온 영화들 안에서 그 사나이들의 면모를 볼 수 있는데, 아마도 내 생각에는 <리쎌 웨폰>에서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의 관계가 가장 근접한 예가 될 것이다. 혹은 <다이하드>의 흑인 형사와 존 맥클레인이 그럴 것이다. <리쎌 웨폰>에서 멜 깁슨은 사생활이 엉망진창의 사내지만 일에서만큼은 프로페셔널리즘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 일보다 가정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대니 글로버는 항상 멜 깁슨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다이하드>의 흑인 형사의 절제된 지도가 없다면 존 맥클레인의 망아지 같은 활약상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나이들의 스크루볼 드라마라고 부를 만한 이 영화들과 <아메리칸 갱스터>는 유머를 제하고 성격만 유사하다. 리치의 단짝 형사가 일찌감치 사라지는 것은 관객의 심리를 위해 그러해야 할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까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다. “이태리 놈들과 네가 다르듯 나도 그들과 달라”라고 리치는 프랭크에게 말하는데 그건 자신들을 동급으로 보아달라고 우리에게 거는 최면술이다.

트루포의 등장과 둘의 비대칭적 대구 관계를 거치고 나면 둘 중 누가 선인이고 악인인가 하는 문제는 흐릿해진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둘 중 누구도 악인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 혹은 그 악의 일부만 봄으로써 더 매혹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메리칸 갱스터>가 인물을 다루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선악의 명확한 판단 문제는 이 매혹론의 다음 차원이므로 이 영화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미국을 비판하거나 해부할 의지도 생각보다는 덜 중요하다. 다르게 말하면 매혹적인 두개의 모델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프랭크 대 리치’라는 구조로 버티고 있는 이유다. 왜 이 두 사람이 영화의 중간부터 만나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둘 중 누구 하나를 거꾸러뜨려서는 안 되는가. 둘은 사실 같은 팀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할리우드가 오래도록 존중해온 불평등의 지배구조를 깨고 일어선 인민주의적 소영웅의 개척사가 하나 있다. 프랭크의 스토리. 그런데 또한 불타는 집념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공직자의 부패 척결 스토리가 하나 있다. 리치의 스토리. 그러니까 이 둘이 맞붙으면 실상 서로 어울릴 수 없으며 한쪽이 패배해야 하는데도, 그러는 대신 둘 다 승리하고 보존되면서 각각 두개의 이야기로 흐르도록 필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메리칸 갱스터>의 평행구조다. 프랭크와 리치는 그 시대에 존재했던 범죄자와 형사로서 지금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 신화적 인물로서 어깨를 겨루는 두 소영웅이다. 영화는 두 사람을 동일하게 존중한다. 두명의 윌리 스탁, 혹은 윌리 스탁의 두 가지 모습.

마주보고 앉은 두개의 신화적 모델

<아메리칸 갱스터>를 극적인 실화영화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 영화의 흥미로운 소재만 지적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자기의 사업적 기술에서는 훌륭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인인 범죄자와 도덕적으로는 해이하지만 사회·윤리적으로는 청렴한 경찰의 대결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일부만 맞는 말이다. 이 영화는 은연중에 그보다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이때 다시 <대부>를 말해야만 한다. 오래전부터 <대부>가 미국사회의 뒤안길을 반영한 사회학적 텍스트로서 가치가 높다는 점에 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아도 그 말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겠다. 만약 그렇다면 죄와 벌, 암투와 시행착오, 떠밀려가는 낭만과 썩어가는 믿음이라는 <대부>가 거둔 서사의 재미는 뒷전으로 밀어야 할 텐데 도저히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이 영화가 미국 사회의 그늘을 비추고 있다고 말하는 건 진부한 원론이다.

<대부>에 의의가 있다면 그건 할리우드가 탄생시킨 성공과 퇴락에 관한 가장 탄탄한 신화적 서사라는 점이다. <대부>와 <아메리칸 갱스터>가 배경으로 선택한 실존했던 사회의 의미란, 성공하고 퇴락하는 신화적 인물들을 얻을 수 있는 영화적으로 중요한 기회의 텃밭이라는 점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아메리칸 갱스터>는 차라리 먼 길을 돌아 다시 <대부>와 같은 종류의 영화가 된다. 아니 같은 종류의 오해 안에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영화다. <대부>의 기나긴 존속의 힘이 그 자체의 신화적 자생력에 있는 것처럼, <아메리칸 갱스터>의 매력은 스스로 발굴해낸 두 인물, 프랭크와 리치의 신화성에 대한 집착에 있다.

간단히 물어보면 될 것이다. 과연 프랭크의 인생 역정이 매혹적으로 비치지 않았다면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프로젝트의 시작은 가능했을 것인가. 실존인물 프랭크는 자신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이 영화의 초안이 된 기사를 쓴 <뉴욕 매거진> 기자에게 “이봐, 지금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앉아서 당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거야. 걸어다니며, 말하고 있다는 거. 이미 수백 번은 죽었어야 하는데도 말이지. 왜 그런지 알아? 그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는데(씨네21 633호-아메리칸 드림의 뒷골목을 겨누다), 그의 말이 맞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핵심은 사회적 비판이나 해석 혹은 비유가 아니라 이미 말한 대로 매혹에 있다. 그런데 그건 프랭크에 관한 매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리치라는 인물에 대한 매혹으로도 번진다. 미국을 살아가는 두 사나이에 대한 철저한 신화적 매혹, 그것이 <아메리칸 갱스터>의 방점이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거짓의 시대를 살며, 그것보다 더 거짓 같은 자기의 신화를 이룩하거나 지켜나간 두 이상적 개척주의자, 인민주의자의 미국적 신화를 그리는 영화다. 그러므로 프랭크와 리치가 마주 앉아 조용히 담판을 벌이는 마지막 장면은 두 개의 신화가 만나는 제 삼의 신화의 장이다. 마주보고 앉은 두 개의 신화적 모델. 둘은 서로에게 훌륭한 파트너이며 이웃이다.

그렇게 하여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우리에게 요구한 합의란 마침내 신화적 인물의 공존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윌리 스탁이 자신이나 청중을 촌뜨기라고 낮춰 부르며 설득을 끌어낸 것이라면, <아메리칸 갱스터>는 우리를 향해 두 신화적 인물의 희귀한 공존의 자리를 모델화해 그들의 담합을 보여주면서 말없이도 강력한 연설의 장면화를 펼친다. 영화 속 청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이 매력적인 신화적 인물들의 세계를 통과해 도착한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가능해진 합리적 거래와 합의의 신화를 설득한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미국이 사랑해온 신화적 초상에의 욕망을 결코 숨기지 못한다. 미국인이 그리워하는 두개의 아름다운 미국 인민 혹은 시민의 성공적 초상을 지금 이 어두운 시대에 본다는 것은 확실히 아이러니지만, 그럼에도 <아메리칸 갱스터>가 이번 아카데미의 가장 강력한 핵이 된다면 지금까지 말한 점들이 반드시 통했다는 뜻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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