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면역이 자라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그녀를 살리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것 같은 소명을 연인에게 남기던 손예진은 어느 때부턴가 환자복을 벗고 병실을 나섰다. 더이상 그녀는 목숨 바쳐 지켜야할 여인이 아니었다. <외출>에서는 불륜을 즐기다 사고를 당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더니, <작업의 정석>에서는 무대에 올라가 광란의 샤워쇼를 펼쳤고, <연애시대>에서는 이혼한 남편에게서 잡아낸 인연의 붉은 실을 당겼다 놨다 했다. 그리고…. 급기야 이제는 진한 색조 화장과 립스틱, 면도칼로 무장한 희대의 소매치기다. 영화 <무방비도시>에서 그녀가 분한 백장미는 몸 구석구석에 카리스마와 냉소를 가득 채운 여자다. 등 뒤에는 지독한 아픔을 지니고 있지만 소매치기 조직을 운영하며 잔인한 술수를 부리는가 하면, 위기 앞에서도 외려 상대의 기를 질리게 만든다. 게다가 어떤 남자도 이성을 잃게 만드는 치명적인 눈빛과 몸짓까지.
2008년을 일주일 앞둔 지난 12월 21일, 그녀를 홍대 부근의 어느 클럽으로 초대했다. 낮에는 타투숍을 운영하고, 저녁에는 조직원들이 ‘수금’해온 돈을 정산하며 하루를 끝내는 백장미의 또 다른 일상이 그려졌다. 하루 종일 날이 서 있던 그녀가 비로소 긴장의 끈을 조금이나마 놓는 시간이다. 그녀는 어느 틈에 자신의 목을 겨눌지 모르는 또 다른 칼날을 피해 사람들 틈으로 숨는다. 자욱한 스모그와 강하게 내리쬐는 핀 조명이 그녀의 모습을 감추자, 다른 이의 품속을 겨누는 그녀의 본능적인 시선도 잠시 숨을 고른다. 말하자면 백장미의 유일한 무방비도시. 지난 4개월 동안 날 선 독기를 품어야 했던 손예진도 조금씩 나른해졌다.
-<무방비도시>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조금은 의외였다. 평소 범죄 장르영화를 즐겨 본 편인가. =거의 보지 않았다. 나는 스릴러도 무서워하고, 심지어 앞으로 호러영화도 찍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네가 나중에 안 찍나봐라” 이럴지 모르지만. (웃음) 그런데 무서운 건 정말 싫다. 그런 영화를 보면 잠도 잘 못 자고, 끊임없이 자극으로 남는 게 있어서….
-악몽을 잘 꾸는가보다. =가위에 잘 눌리는 편이다. 차에서 잠에 들면 정말 많이 눌린다. 아마 다른 배우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을 걸? 깊이 자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어서 그런지. 한번은 가위에 눌린 상태에서 한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린 적이 있다. 몹시 시끄러워서 “다 조용히 해!!”라고 외치며 깨어났었지. (웃음)
-나도 가위에 잘 눌리는 편인데, 한번은 “너 누구냐?”고 했더니 “네가 알 것 없다”고 그러더라 =아악!!! 정말 무섭다. 아니, 무서운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아니, 그냥 진짜 무서워하는가 싶어서…. =진짜 무섭다니까. 한번은 어떤 손이 내 목을 쓱 만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 적도 있다. 아직도 그 차가운 느낌이 아주 생생하다. 혹시 파마한 귀신은 본 적 있나? 잠결에 눈을 떴는데, 파마머리를 한 사람이 침대 옆에서 뒤돌아 있더라니까.
-왠지 백장미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잔인한 여자인데. =처음에는 너무 세서 감당하기에 벅찰 듯싶었다. 무엇보다 이 여자의 악행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 다른 이유는 없고 무작정 강하게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우연히 다시 읽어보니까, 굉장한 아픔이 느껴지더라. 뭐랄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게 더 풍부해 보였다. 첫 느낌처럼 건조하게만 보이지도 않았고.
-백장미란 이름을 들었을 때는 어땠나. 지금까지는 매우 평범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나. 지원, 서영, 수인, 지혜, 은호, 수진, 희애 등등. 물론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불린 이름은 주일매지만…. =만화적이면서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것 같더라. 그녀의 카리스마가 한순간에 느껴지는 이름이랄까. 왠지 깻잎머리를 하고 껌 씹는 언니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웃음)
-시나리오를 보면 백장미의 몸을 전체적으로 훑는 느낌이 많았다. ‘그녀의 섹시함과 아름다움에 놀라는’ 이런 식의 설명이 매우 많더라. =‘그녀를 훔쳐보다 흠칫 놀라는 대영’ 이런 것도 있다. (웃음) 그걸 본 나는 오죽했겠나. 처음부터 끝까지 섹시하게 보여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다. 지금껏 눈을 어떻게 뜰지, 위로 뜰지, 아래로 뜰지 이런 걸 고민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녀의 섹시함에 등장하는 남자들이 이성을 약간씩 잃어버린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요즘 관련기사가 많이 나와서…. (웃음)
-홍보 일정보다도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가 가장 걱정이겠다. =압박이 심하다. (웃음) 얼마 전 후시녹음을 하면서 몇 장면을 봤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 내 모습이 정말 낯설었다. 그런데 관객은 어떻겠냐고. 게다가 최종편집이 3시간30분이 나왔는데, 거기서 1시간30분을 잘라냈기 때문에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나도 확신하기가 어렵다. 영화가 참 쉽지가 않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감독님 뜻이거나 투자하시는 분의 뜻이거나. (웃음)
-<연애시대>에서는 통닭을 사들고 들어와 지호 앞에서 우는 장면의 아이디어를 직접 냈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나. =이건 아마 편집된 1시간30분에는 들어가 있지 않을 텐데. (웃음) 백장미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 전에는 내가 좀 많이 우는 장면을 촬영했다. 찍고나니 새벽 4시인가 그랬는데 내 얼굴이 완전 황폐화했더라. 간단히 씻고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데 왠지 메이크업 없이 이 몰골로 찍으면 백장미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마스카라에, 라이너에, 립스틱으로 무장하고 나오니까. 아마 나도 나름대로 백장미가 돼버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도 했을 것 같다.
-최근에 연기한 작품들을 보면 이전의 눈물의 여왕과는 거리가 있는 역할들을 해왔다. 단순히 분류하자면, 작업녀, 유부녀, 이혼녀 등등인데, 혹시 이제는 이전 작품에서 연기한 눈물의 여왕이 재미없는 건가. =솔직히 그런 부분도 있다. 물론 아직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나 <클래식>은 가슴 깊이 남은 작품들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모습만 보이려고 했던 건 아니고 다른 작품들 가운데에서 고르다보니 그렇게 된 거였지.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보여줄 게 더 많은데 너무 하나에 몰리는 게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하려면 했겠지만 자신이 없었던 거지.
-그런 변화가 자연인 손예진에게 가져온 변화도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시각이 넓어진 게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걸 놓고 보면, 예전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것의 깊이에만 고민했던 거지. 하지만 연기를 거듭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간이 가진 외로움이나 아픔은 누구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연기로도 표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그러다보니 남편의 불륜을 봐야 하는 아줌마나 이혼녀, 백장미 같은 여자도 연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혹시 <외출>에 출연한 배우로서 허진호 감독의 <행복>도 욕심나지는 않았을까. =글쎄, 내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해봤다. 다만 <행복>의 은희가 <외출>의 서영과 연장선상에 있는 여자라는 느낌은 들었다. 강한 듯 보이면서도 여리디 여린 여자들이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손예진에게 바라는 캐릭터와 본인이 욕심내는 캐릭터 사이에 간극이 클 것 같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간다고 해서 그게 방향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팬들의 기대에만 맞추는 것도 무리가 있는 거고. 결국 내가 원하는 걸 할 수밖에.
-어제(2007년 12월20일) 기사가 갑자기 떴는데, 차기작이 <아내가 결혼했다>라더라. 주인공 인아는 사실 반응이 엇갈리는 캐릭터다. 어떤 여자처럼 보이던가. =소속사에서도 여자 직원들은 대부분 통쾌해하고, 남자들은 이게 뭐냐고 그런다. (웃음) 어떻게 읽었나? (서로 괴로울 것 없이 말끔히 헤어지는 게 낫지 않으냐고 답하자) 그거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딱 탄로가 나네. 하하하. 그래도 재밌지 않나. 인아라는 여자는 속마음을 알 듯하면서도 내보이지 않는 여자다. 그러면서도 남편한테는 사랑스럽게 잘하는 면이 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정말 대단한 여자지. (웃음)
-정윤수 감독은 “손예진이 인아를 연기하면 이른바 말하는 여우 같은 면과 진심을 드러내는 면의 사이를 교묘히 넘나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너무 어려운 연기를 주문하시는 것 아닌가. (웃음) 나로서는 시나리오의 산뜻함 대로 연기를 하고 싶지만, 사실 인아도 정말 큰 도전이다. 나 스스로 나를 산 넘고 산 넘게 만드는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