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은 여정 끝에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수장들과는 다른 기조를 지닌 터라 곳곳에서 변화의 바람을 전망하는 중이다. 매번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하는 영화계도 변화의 시점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분위기다. ‘실용정부’를 표방하며 경제회복을 제1 과제로 내건 이명박 정권은 한국 영화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아직은 인수위원회도 꾸려지지 않았고, 아울러 발표된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 나도는 건 기대와 우려 혹은 무관심뿐이지만 그 안에서 이후 5년의 한국 영화계를 바라보는 밑그림을 살펴봤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선거 전 각종 간담회와 토론회에서 이명박 당선자를 만났던 여러 영화인들은 “우려했던 것보다는 합리적인 지원정책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난 2007년 11월26일 열린 문화산업정책간담회에서 이명박 당선자와 문화정책에 관해 토론했던 이현승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은 “문화산업기금을 내주고 문화산업종사자들이 알아서 자유롭게 쓰도록 하는 스타일의 정책을 펴지 않을까 예상된다”고 말했다. “문화산업종사자들이 시나 정부에 협조를 얻는 일이 지금껏 얼마나 어려웠는지도 파악하고 있더라. 일일이 간섭하기보다는 더욱 적극적인 지원형태를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에서 열린 문화예술인과의 간담회에서 이명박 당선자와 만났던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도 “현재 전체 예산의 1%선에 머물러 있는 문화산업지원예산을 더 끌어올리고 영화에도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며 “그로 인해 영화산업이 활성화된다면 나쁠 것이 없다”고 전한다.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한국영화의 수익률 악화시대, 산업붕괴의 조짐을 앞두고 있는 영화계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다. 문화산업정책간담회를 주최한 이강복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 또한 “이명박 당선자가 문화를 단순히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는 중요한 서비스 산업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업계에서 일치된 목소리를 전한다면 충분히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기대, 우려, 무변화 등 의견 분분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대규모의 지원책이 오히려 위기의 본질을 흐릴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 문화연대의 이동연 문화산업정책팀장은 “실용경제를 추구하는 정부인 만큼 문화가 가진 상징적인 이미지를 개발로 포장하는 식의 사업들이 많아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특히 한-미 FTA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영재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국장은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은 이상 한-미 FTA는 국회에서 비준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그럴 경우 스크린쿼터를 원상복구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고 전망했다. 기대와 우려가 오가는 사이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말하자면 현 한국 영화계의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서영관 오픈앤디드 픽쳐스 대표는 “옛날에는 영화산업이 워낙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원을 많이 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지금 대기업이 산업구도를 재편했고 그 안에 기존 영화인들이 뛰어든 거나 다름없다”며 “이제는 지원보다도 부가판권을 회복하고 독과점을 방지하는 정책들에 더 많이 관심이 기울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영상산업연구소의 김도학 연구원은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노무현 정권도 실용주의 정책으로 가지 않았나.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등 보기에는 안 그렇게 보였지만, 사실상 산업을 시장에 맡겨놓는 정책들을 펼쳤다. 이명박 정권이 기조대로 실용정책을 편다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준동 부회장도 한국 영화계가 급격한 변화를 맞지는 않을 거라는 입장이다. “한국 영화계가 이만큼 온 것이 정부가 주도했기 때문인 건 아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건 부가판권문제나 독과점문제가 영화계에서는 큰 이슈지만, 정권담당자는 아무래도 콘텐츠 사업 전체를 볼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인들 5월 영진위 개편에 귀추 주목
여러 설왕설래가 오고 가는 가운데, 영화인들의 관심은 오는 5월 개편을 앞두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에 모이고 있다. 정권이 바뀐 이상, 정부부처가 개편되고 그 가운데 문화관광부도 변화를 맞게 되면서 산하부처인 영진위 또한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겠냐는 예상이다. 또한 그동안 영화계에서 소외당했다고 주장하는 영화인들이 새 정권의 힘을 발판 삼아 영진위를 장악하려 한다면 영진위 설립 초기에 있었던 여러 분란들이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 문화정책위원회 위원을 맡았던 조희문 인하대 교수는 “현재 영진위를 운영하는 이들의 폐쇄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영화 관련 제도가 미비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현 영진위는 지나치게 세력화되고 이념화되면서 정책도 왜곡시킨 면이 있다. 영진위의 방향성이 큰 구도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영진위 관계자들은 “그동안 영진위가 가져온 경험과 노하우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현승 영진위 부위원장은 “예전과는 달리 이제 영진위는 공공기관에 관한 운영법률에 따라 위원장을 선출하게 된다”며 “현 영진위 위원 가운데 5인과 외부에서 온 4인의 추천위원이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3배수의 후보를 추천하고, 장관이 임명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결국은 정권쪽에서 주문이 있지 않겠냐”는 시선도 있다. 한 제작자는 “그런 주문이 올 경우 현재 위원회가 피해갈 수 있겠냐”며 “입장 차이에 따른 세력다툼은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서영관 오픈 앤디 픽쳐스 대표 또한 “지금까지는 영진위가 영화현장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정책들을 펼쳤지만, 대세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산업적인 발전은 사실 모든 영화인들이 원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기대를 품은 한 영화인의 말은 섣부른 기대라기보다는 절박한 소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용’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희망적인 기운 이면에는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의 산업화가 가져온 폐해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과연 한국 영화계는 5년 뒤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 “영상산업대국론의 취지는 좋다. 하지만 그것도 시장의 공정성이 구축되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한 영화인의 말처럼, 현재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발전’이라는 이상적인 그림만을 꿈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 영진위는 지나치게 세력화한 이념적인 집단이다”
조희문 인하대 교수·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 문화정책위원회 위원
-새 정권의 문화 관련 정책 기조는 어떨 것이라고 보나. =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실용정부가 표방하는 대로 국가의 영역을 줄이고 민간의 영역에 맡기는 부분이 많아지지 않겠나. 하지만 문화적인 가치를 무시하며 일방적인 방식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 같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지나치게 편을 가르고 상대방 이야기를 수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는 서로가 시행착오나 오류를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본다.
-현 정권의 문화 관련 정책에서 개선해야 될 점이 뭐라고 생각하나. = 지난 정부는 지나치게 이념지향적이었다. 자율, 창의보다는 목적성을 강조했고, 그러다보니 각종 교육정책에 치중했다. 선의적으로 볼 때 교육이라는 건 잘 가르치겠다는 것이지만, 지난 정부의 교육은 이념지향적인 느낌이 강했다. 새로운 문화정책이라면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탈이념화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교수가 소속한 한반도선진화재단의 제출안에 보면, 문화관광부가 분리되어 문화부가 미래인적자원부로 통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정부의 효율화 측면에서 보태는 하나의 의견 정도로 보면 된다. 실행될지 안 될지는 모르는 문제다. 한선재단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조리 시장경제에 맡기자는 것은 아니다. 공공영역과 민간영역이 공존하고 서로 보완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본다.
-영화진흥위원회도 새로운 구성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조직이 꾸려지는 만큼 문화관광부와 연계해서 변화가 짐작되는데. = 변화는 있겠지. 앞으로 영화진흥정책이 단순히 영화만을 다룰 것인지, 프랑스처럼 시청각을 통합하는 쪽으로 갈 건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부조직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영역을 통합하는 식으로 간다면 그에 따라 각 분야가 모여 시너지를 이루는 형태로 갈 것이다.
-기존 영진위는 어떻게 평가하나. = 영진위는 운영하는 사람들의 폐쇄성이 문제다. 한국 영화계 제도가 미비한 경우는 없었다. 나름 제도라는 건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졌고 운영되어왔다. 문제는 운영하는 중심이 과연 취지에 맞게 제도를 운영했는가다. 지금 영진위는 지나치게 세력화한 이념적인 집단이다. 그것 때문에 정책이 왜곡되었는가 하면 사람들 사이에 반목도 생겨났다. 이건 문화를 경직시키는 상황에 대한 우려다. 문화정책을 다루며 자율을 이야기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