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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시뮬라시옹으로서의 대통령

케네디 암살 의혹의 보드리야르적 재구성, <J.F.K>

“거대한 군부 조직과 비대한 군수산업의 결탁은 미국의 체험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이들의 경제적, 정치적, 심지어 영적 영향력의 총체를 모든 도시, 모든 주정부의 청사, 연방정부의 모든 사무실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정부의 위원회에서 이 군산복합체가 부당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된 권력이 발흥할 재난의 위험은 현존하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절대로 이 결탁 세력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게 내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영화는 퇴임을 3일 앞둔 아이젠하워의 연설로 시작한다. 이어서 흑백 뉴스릴의 몽타주로 당시의 미국 상황을 숨가쁘게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1960년 11월 케네디의 당선은 곧바로 취임식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틴 루터 킹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외치고, 말콤 엑스가 격정적인 제스처로 분노를 토하고, 하얀 두건을 뒤집어쓴 KKK 단원들이 십자가를 불태운다. 베를린에서는 케네디가 “나는 베를린 시민”이라 선언하고, 쿠바에서는 군복을 차려 입은 카스트로가 선동적인 제스처로 열정적인 연설을 한다.

망명 쿠바인들을 동원한 CIA의 피그만 상륙 작전은 케네디 정부의 지원 거부로 실패로 돌아간다. JFK는 이른바 ‘자유 쿠바인들’을 죽게 내버려뒀다고 비난받는다. 베트남전쟁에 대해 케네디는 “미국이 참전 안 하면 월남이 질 것이라 하지만, 그런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전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물론 전쟁을 바라는 군산복합체의 이해에 어긋나는 발언이다. 19662년 케네디는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던 소련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나 그 대가로 쿠바의 공산화를 묵인했다고 비난받는다.

내레이터의 말대로 “케네디는 자유의 상징이었고, 변화와 개혁을 상징했다”. 민권운동, 히피운동, 반전운동 등 60년대에 미국인은 그야말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열망을 인격으로 대변한 것이 케네디.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새로운 ‘비전’을 보았고, 그 비전에는 ‘평화’도 들어 있었다. “무기에 의한 평화가 아닙니다. 냉전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 함께 삽니다. 우리는 똑같은 공기를 숨쉬며, 똑같이 아이들의 미래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습니다.”(We are all mortal)

포맷과 색채로 직조한 서사

영화는 출처와 포맷이 다른 다양한 영상 자료들을 사용한다. 그중에서 가장 섬뜩했던 것은 역시 ‘재프루더 필름’. 여성의류업을 하는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라는 시민이 우연히 촬영한 이 동영상은 총탄이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피가 터지면서 머리의 일부가 날아가는 충격적인 장면을 보는 순간 객석에 앉은 관객이 비명에 가까운 짧은 탄식을 토해내던 것이 기억난다. 이 장면은 이 사건에 대한 공식기록인 ‘워런 보고서’의 내용이 옳지 않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사용된다. 텔레비전 뉴스, 영화관의 주간뉴스, 8mm 홈무비. 이것들은 각자 포맷도 다르고, 색채도 다르다. <JFK>의 생명은 역시 이 다양한 영상 자료들을 결합시키는 방식에 있다. 가령 케네디의 암살을 경고하는 여인이 들판에 버려지는 장면은 극영화에 속하나, 감독은 이 장면을 흑백의 8mm 홈무비 포맷으로 제시한다. 그런가 하면 오스왈드가 이른바 ‘애국시민’에게 저격당하는 장면은 텔레비전의 화질을 갖고 있으나, 극장 스크린의 포맷으로 처리된다. 마치 칸딘스키처럼 포맷과 색채로 작곡을 하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는 순수한 형식 실험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 영화에서 포맷과 색채의 변화는 서사의 전략으로 활용된다. 그리스인들은 서사의 모드를 ‘디에게시스’(diegesis)와 ‘미메시스’(mimesis)로 구별했다. 판소리로 말하면, 가수가 화자로서 아니리를 하는 대목은 ‘디에게시스’, 가수가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창을 하는 대목은 ‘미메시스’에 해당한다. 내레이션과 더불어 디에게시스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배우들이 연기하는 미메시스로 돌입했다가, 증인들의 증언과 함께 디에게시스 모드로 들어간다. 이렇게 서사의 모드가 바뀔 때마다 화면의 포맷과 색채가 달라진다.

사실과 픽션의 결합

하지만 거기에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영화는 외려 평범해졌을 것이다. 출발하는 디에게시스 모드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 흑백 화면은 대개 도큐먼트로서 실재(reality)에 속하고, 컬러 화면은 대개 허구(fiction)로서 가상에 속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재프루더 필름은 도큐먼트이나 컬러로 되어 있다. 극 속의 미메시스 모드로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제 컬러는 극중에서 현실이 되며, 흑백은 외려 기억이나 증언과 같은 가상의 모드로 사용된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어서 몇몇 사람의 증언은 컬러로 제시된다.

극 속에서 증인들이 증언하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가상 속의 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가상의 가상이 ‘일종의’ 실재가 된다. 말하자면 ‘워런 보고서’가 밝혀내지 못한 암살의 진리 혹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사실에 가장 근접한 개연적 가설이 되는 셈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렇게 다양한 포맷과 색채로 모드의 변화를 연출하다가 그것으로 마침내 가상과 현실의 관계를 뒤집어버리는 데 있다. 장자와 나비처럼 꿈속에서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가상에서 다시 가상으로 들어가면 현실이 나온다.

실제로 증언이나 회상장면에도 종종 연출된 화면과 기록영화가 더불어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영화는 여러 겹의 모드를 드나드는 복잡한 서사의 전략을 구사한다. 그러는 가운데 극영화와 기록영화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관객은 어디까지 실재이고 어디까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에서 감독이 제시하는 가설을 거의 실재로 받아들이게 한다. 영화의 인기로 결국 1992년 의회에서 케네디 암살사건의 재조사를 명령한 이른바 ‘JFK 법’이 통과되고, 같은 해 가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거기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역사와 음모론

영화가 나오자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음모론을 부추긴다고 비판했고, 감독은 이 영화가 “가까운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 응수했다. “그것은 흑백에서 컬러로, 거기서 다시 흑백으로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독특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우리는 당신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든다. 그게 현실인 척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배우들을 윌리엄 해리슨 등으로 분장시켜놓고 스크립트를 읽게 한 다음 카메라로 찍어, ‘이것이 진리’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현실’(reality)이라는 바로 그 생각 자체를 의문에 붙이려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관념 자체를 의심한다는 감독의 말은 보드리야르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이 프랑스 철학자에 따르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시뮬라시옹’, 즉 이미 권력과 매체가 연출로 구성되는 거대한 허구라고 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드리야르 철학의 민주당 버전을 읽을 수 있다. 자유와 개혁, 민주당 정체성의 인격적 화신이 군산복합체의 정치적 음모에 희생당했고, 그들이 아직도 ‘그 속에서는 케네디의 암살이 오스왈드 개인의 단독 범행인’, 그런 세계를 연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드리야르의 음모론(?)은 이보다 규모가 더 큰 것이다. 설령 대통령을 뽑을 수는 있어도 권력을 선출할 수는 없다. 우리가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든 권력은 늘 그 자리에 있다. 민주주의는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환상이다. 이 환상을 위해 대통령은 중요한 존재로 여겨져야 하며, 그 존재의 광휘를 마련하기 위해 케네디는 암살당해야 했다는 것. 이렇게 “권력은 존재와 정당성의 미광을 발견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살해를 연출할 수도 있다”.

<그때 그사람>이라고 했던가?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티브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 그 사건에서 무엇을 주제화해야 할지 감독 스스로 분명하지 않다보니 그냥 사건을 희화화해 블랙코미디를 만드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텔레비전을 보니, 오늘(12월19일) ‘대통령 선거’라는 행사가 있었나보다. 외신을 보니 “개를 데려다놔도 선출될 것”이라고 하더니, 세상에, 그 예측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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