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거리는 붉은 장미. 친절하게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소방대원. 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길을 건너는 어린이들. 방에서 범죄영화를 보는 여자. 그리고 뜰에서 잔디에 물을 주는 남자. 백인 중산층 마을의 평화로운 모습. 물을 주던 사내는 목덜미를 움켜쥔 채 쓰러지고, 개가 달려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린 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먹는다. 카메라는 사내가 누운 잔디밭 아래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들의 어두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로써 미국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 평화로운 일상의 바탕에 깔린 어두운 세계를 암시한다.
정말 이상한 세상
아버지가 쓰러지자, 제프리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마을로 돌아온다. 마을에 도착한 그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은 가위로 잘려나간 인간의 귀. 이는 브뉘엘의 영화에서 눈동자가 칼로 베어지는 장면만큼 충격적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묘하게 시체에는 끌렸던 게 바로크의 취향이라고 했던가? 절단된 신체는 마땅히 역겨움을 주어야 하나 인간은 역겨운 물건을 보면서도 거기서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정말 궁금할(real curious) 뿐이에요.”
카메라는 잘려나간 귀를 클로즈업하고, 제프리는 렌즈를 따라 귓속의 어두운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간 앨리스의 눈앞에 이상한 세계가 펼쳐지듯이, 이미 푸릇푸릇 곰팡이가 슬기 시작한 귓속으로 따라 들어간 제프리의 눈앞에도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기괴한 세계가 펼쳐진다. 애초에 평화로운 룸버튼 마을의 일상에 잘린 귀는 어울리지 않는 것. 평화로운 잔디밭 아래 어두운 굴에서 클로즈업된 거대한 개미들이 우글거리듯이, 피상적인 평화 아래로 기괴한 욕망의 세계가 징그럽게 꿈틀거리고 있다.
친숙한 일상의 표피 아래에 숨어 있는 기괴한 세상. 제프리는 발렌스의 옷장에 숨어 처음으로 그 세계를 목격한다. 그 세상은 한편으로는 충격을 주나, 다른 한편으로 동시에 거절하기 힘든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친숙하고도 낯설고, 역겹고도 매력적인 이 세계. 프로이트라면 아마 ‘운하림리히’라 불렀을 것이다. 사람의 것과 똑같이 생겼으나, 더이상 사람의 몸에 붙어 있지 않은 귀. 그 귀 같은 세상이 또한 데이비드 린치의 세계이기도 하다. 제프리와 샌디가 교대로 반복하는 대사. “정말 이상한 세상이야. 그치?”
중첩된 성욕
프랑크로 분한 데니스 호퍼의 열연이 없었다면, 영화의 매력은 상당 부분 사라졌을 게다. 프랑크는 성교에 들어가기 전에 마스크를 쓰고 일단 호흡을 가쁘게 만든다.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산소의 흡입량을 줄이는 ‘질식선호증’(asphyxiophilia). <감각의 제국>에서 남자주인공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바로 이 증상이다. 하지만 그보다 인상적인 것은 성교를 할 때 프랑크의 감정 상태. 슬픔에서 시작한 그의 감정 상태는 분노로 절정에 이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변태적인 것이다.
프랑크의 성교는 실제로는 프로타주(frottage). 미술에서는 바닥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문질러 우연한 무늬를 얻는 기법을 의미하나, 우리의 맥락에서는 삽입없이 오로지 성기의 마찰에만 의존하는 성교를 말한다. 그가 바지를 입은 채로 도로시의 몸에 올라가 격렬하게 하체를 움직일 때, 차라리 폭소를 터뜨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웃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행사하는 폭력의 진지함 때문이다. “빌어먹을, 쳐다보지 마!”(Don’t you fuckin’ look at me!) 폭언을 퍼부으며 그는 도로시에게 폭행을 가한다.
“엄마, 엄마, 아기는 섹스를 하고 싶어.” 거기에 더해지는 것이 근친상간의 욕망.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도로시는 아기의 입에 젖을 물리듯 옷고름을 물리고, 이로써 프랑크는 구강기의 아기로 돌아간다. 상상 속에서 상황은 급박해진다. “아빠가 오고 있어, 아빠가 오고 있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속에서 그는 절정에 오른다. <블루 벨벳>의 기괴함은 안타고니스트의 이 중첩된 성적 취향에서 비롯된다.
“아직 살아 있어. 반 고흐를 위해 해줘.” 바닥에 누운 도로시의 몸 위로 정액 묻은 휴지를 버리듯 내뱉은 프랑크의 한마디. 이로써 관객은 그가 도로시의 남편을 인질로 잡고 있으며, 그의 귀를 자른 것이 반 고흐로부터 받은 영감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제 어두워졌어.” 프랑크가 어둠의 세계에 속한다면, 우리의 프로타고니스트는 밝은 세상에 속한다. 하지만 그 역시 지금은 옷장의 어둠 속에서 이 장면을 훔쳐보고 있다. 제프리는 물론 감독의 알터 에고(alter ego)로, 소녀의 방에 숨어들어가 옷 벗은 몸을 훔쳐보고 싶다는 사춘기의 욕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가 옷장에서 본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이지 않은가? 아마 그것은 사춘기 시절의 욕망이라기보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악몽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부모가 섹스하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한 아이의 충격에 더 가깝다.
“네가 탐정인지 변태인지 모르겠어.” 도로시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제프리에게 샌디가 말한다. “글쎄, 그게 내가 알아야 할 것이고, 네가 알아내야 할 것이겠지.” 이로써 제프리의 탐정 놀이는 자기 자신의 잠재의식에 대한 탐구가 되고, 그 이후에 그가 체험하는 모든 악몽은 사춘기 소년을 성인으로 성숙시키는 통과의례가 된다. 제프리는 꿈에서 프랑크가 도로시를 때리는 장면을 본다. 그를 소스라쳐 깨어나게 만든 이 악몽은 제프리 자신의 욕망임이 드러난다. 그 역시 결국은 섹스를 하면서 도로시를 때리게 되지 않던가.
도로시를 때리며 쾌감을 느끼는 프랑크의 욕망은 또한 제프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프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있는 셈이다. 하나는 잔디에 물을 주다가 쓰러져 병원에 누운 부몬트씨, 다른 하나는 여자를 독점한 채 어린 도전자에게 폭행을 가하는 프랑크. 그뿐인가? 그에게는 여자도 둘이 있다. 어머니와 다름없는 도로시와 장차 아내가 되어야 할 샌디. 여기서도 한 여인은 어둠에 속하고, 한 여인은 밝음에 속한다. 이 모순적 상황은 제프리가 프랑크의 양미간에 총알을 박아넣음으로써 깨끗이 해결된다.
피상성으로서 일상
카메라는 다시 귀를 비춘다. 하지만 그것은 더이상 사람의 몸에 붙어 있지 않은 ‘언캐니’한 귀가 아니다. 카메라가 줌아웃되면서 귀는 얼굴로 이어지며 평화롭게 정원에 누운 제프리의 몸을 비춘다. 잘린 귀를 통해서 “정말 이상한 세상”으로 들어갔던 그는 붙은 귀를 통해 정상적인 세계로 돌아온다. 창틀에 샌디가 꿈꾸었던 행복(개똥지빠귀)이 날아와 앉고, 앞길로는 다시 소방차가 지나가고, 원뿔 모자를 쓴 어린 도니는 엄마 도로시에게 달려가 안긴다. 모든 상황은 정상화됐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룸버튼 마을은 어쩌면 미국 자체일지도 모른다. 프랑크 부스의 이름은 링컨 대통령의 암살자 존 윌키스 부스를 연상시킨다. 도로시의 남편 발렌스는 링컨과 똑같은 자세로 살해당했고, 영화에서 제프리는 링컨가(街)에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한다. 도로시는 프랑크에게 겁탈과 폭행을 당한 뒤 나체로 제프리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린다. 도로시 역을 한 로셀리니는 이 장면의 연기를 위해 네이팜탄의 폭격을 받은 마을에서 벌거벗은 채 울면서 뛰쳐나오는 베트남 소녀의 사진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블루 벨벳>은 합리성의 표층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어두운 인간의 잠재의식에 대한 영화일 수도 있고, 일상성의 평화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어두운 사회의 기괴한 욕망에 관한 영화일 수도 있고, 케네디의 암살, 닉슨의 도청과 같은 무서운 현실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의 피상성을 유지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관한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해석도 이 영화를 남김없이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감독의 말대로 “모든 이가 같은 것을 보지만, 연상을 통해 각자 다른 영화를 보는 법이다.”
여러 영화에서 따온 인용들의 패스티시. 누아르, 히치콕, 멜로와 패밀리 드라마를 어지럽게 혼합한 메타 장르. 컬트를 장르와 결합시키는 이중 코드. 이 모든 것이 <블루 벨벳>을 탁월한 포스트모던의 영화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정말로 포스트모던한 것은 결말. 샌디의 꿈에서 날아온 개똥지빠귀는 자동인형처럼 보이고, 다시 찾아온 행복한 세계를 바라보며 샌디가 제프리에게 말한다. “이상한 세상이야,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