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질문 하나만 해보자.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의 채시라가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당대의 최첨단 여성상을 창조한 지도 어언 12년. 왜 그렇게 한국 트렌디드라마와 충무로 여성영화들은 광고대행사를 현대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직장 사슬의 최상위라고 끝끝내 주장하고 있는 걸까. 알고보니 여기에는 일간지 통계란에 귀기울이는 충무로 기획자들의 부지런함이 있었던 모양이다. 한 일간지의 통계에 따르면 20대 여대생에게 세 번째로 인기있는 전문직은 광고대행사였다고 한다. 하긴 한주에 섹스칼럼 하나로 마놀로 블라닉을 구입하는 맨해튼의 캐리양보다야 광고대행사 직원이 훨씬 현실적인 모델이기는 하다.
용의주도한 신미수(한예슬)도 거대 광고대행사의 인정받는 AE다. 하지만 신미수가 직장에서 겪는 고난을 고대했다면 기대를 거두는 편이 좋다. 그녀는 술마시고 늦게 출근해 광고주의 분노를 사면서도 절대 잘리지 않고 또 다른 기회까지 얻는 판타지적 인물이다. 한국 로맨틱코미디의 세계란 게 원체 전문직업인의 전문적인 고뇌를 표현하는 데는 인색한 편이니 그러려니 치자. 신미수가 정말로 잘하는 건 남자 꼬이기다. 그녀는 동시에 네명의 남자를 포섭하고 누굴 최종적으로 먹어치울 것인가를 고민 중이다. 하나는 어딘가 음침한 재벌 3세(권오중), 다른 하나는 절간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학교 선배(김인권), 또 하나는 클럽에서 일하는 연하의 래퍼(손호영), 또또 하나는 통신회사의 잘나가는 부장이자 성격 더러운 이웃사촌(이종혁). 신미수는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나.
<용의주도 미스신>은 어딘지 모르게 수·목 트렌디드라마의 에피소드 모음집 같다. 신미수가 네명의 남자들과 벌이는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은 느슨하게 이어지고, 가수 출신 연기자인 손호영의 클럽 공연장면은 마치 라이브 다큐멘터리인 양 별다른 편집없이 통째로 삽입되어 있다. ‘칙 릿’을 표방하고 나선 최근의 충무로 여성영화들이 그렇듯이 <용의주도 미스신>도 이야기를 엮거나 캐릭터의 깊이를 파고드는 데는 크게 개의치 않는 인상이다. 대신 영화는 한 가지에 집중한다. 거침없이 하이톤의 목소리로 카메라를 기습하는 한예슬의 애교다. 그거야 이미 <무릎팍도사>에서 다 보지 않았냐고 반문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예슬의 팬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애교에 종종 무릎을 팍 꿇는 순간이 있을 게다. 참, 한국영화사상 가장 노골적이라 할 만한 PPL이 등장한다. 그것 때문에 미스신의 직업을 광고대행사 AE로 만든 건 아니겠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