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7일 홍콩 그랜드하얏트호텔, 아시아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진 앞에 윌 스미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톰 행크스, 잭 블랙 등과 더불어 이런 종류의 단체 기자회견에 관한 한 최고의 에너지를 자랑하는 그답게 시종일관 큰 소리로 웃고 기자를 향해 장난을 거는 등 거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유쾌함을 과시했다. 한 기자가 질문을 길게라도 할라치면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장난스레 인상을 찌푸렸고, 또 너무나 급한 마음에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마이크 없이 벌떡 일어나 질문을 하는 기자를 향해서는 ‘Security!’를 외쳤다. 함께 했던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 아키바 골즈먼이 자신에 대해 좋은 말이라도 할라치면 메모지에다가 장난스레 “To 프랜시스. 고마워요, 사랑해요. From 윌”이라고 중얼중얼댈 정도로 그는 귀여운 장난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윌 스미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팬서비스 정신으로 충만한 엔터테이너였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그가 보여준 ‘자기희생’의 드라마와는 쉽게 겹쳐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수풀이 무성한 뉴욕의 거리
리처드 매드슨이 1954년 발표한 원작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핵전쟁 뒤, 변종 바이러스가 출몰하는 세상의 종말을 그려 충격을 던져줬다.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바로 오직 주인공 로버트 네빌만이 살아남은 ‘텅 빈 세계’의 모습이었다. 오직 어두운 곳에서만 활동하는 변종인류는 낮에는 등장하지 않기에 그는 세계의 주인이나 마찬가지다. 전망 좋은 항공모함 활주로에서 유유히 골프를 즐기고, 머스탱을 몰고 텅 빈 도로를 질주하면서 사슴을 사냥하고, 텅 빈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물건들은 물론 미술관과 도서관의 유명 작품들과 장서도 모두 그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텅 빈 세계에 홀로 남은 주인공이라는 설정은 절망감의 한켠에서 묘한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그는 오직 해가 지기 전 숙소로 돌아가 거대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기만 한다. 밤만 되면 세상은 싱싱한 피를 찾아 헤매는 변종인간 혹은 좀비들의 아우성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전설이다>는 전 인류가 멸망했다는 설정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대낮의 실제 뉴욕 거리를 카메라에 담아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분주한 도시 뉴욕에서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제작진은 뉴욕시장에게 촬영허가를 얻어냈고 뉴욕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과 워싱턴 스퀘어 파크, 맨해튼 5번가 블록들을 전면 통제해 거리 한복판에서 오직 윌 스미스만이 살아남은 적막한 도심을 표현해낼 수 있었다. 최대한 인적이 드문 주말 새벽시간을 이용해 한달에 걸쳐 뉴욕 곳곳을 촬영했으며, 폐허가 된 도시를 연출하기 위해 부서진 자동차와 가로등 등 온갖 도구들을 설치하고 철거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기에 엄청난 인력과 장비가 동원돼야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뉴욕 거리는 묘한 느낌을 준다. 워너브러더스 영화임을 알리듯 <배트맨>과 <슈퍼맨>의 거대한 간판도 잊지 않는다. 앞서 영화화된 <지구 최후의 사나이>(1964)나 <오메가맨>(1971)의 세계가 무척이나 황량했다면 수풀이 우거져 마치 아열대 지방을 연상시키는 풍경은 무척 이채롭다. 딱히 ‘폐허’라는 느낌보다 생명이 살아 숨쉬는 것 같은 ‘희망’을 주는 것이다. 더불어 낮에는 그 무엇의 위협도 받지 않아야 정상일 텐데 사자 가족이 노니는 시내는 그리 안전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특히 원작의 LA를 뉴욕으로 바꿨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포스트 9·11’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아마도 원작과 가장 다른 지점, 혹은 프랜시스 로렌스와 아키바 골즈먼의 가장 직접적인 의도가 담긴 설정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구원과 자기희생의 드라마
<콘스탄틴>(2005)을 통해 알려진 뮤직비디오 출신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은 다시 한번 시나리오작가 아키바 골즈먼과 뭉쳤다. 앞서 원작 얘기를 더 하자면 리처드 매드슨의 원작은 전통적인 흡혈귀 신화에 현대적인 변이를 가미한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흡혈귀라는 표현까지 있으며 마늘과 십자가를 이용하는 퇴치 방식 또한 등장한다. 실제로 벨라 루고시 주연의 영화 <드라큘라>를 보면서 <나는 전설이다>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그는 “한명의 드라큘라도 그토록 무서운데 만약 전세계가 드라큘라로 득실대면 정말 무서울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후 <나는 전설이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두편의 영화에 대한 그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다. 원작의 느낌을 잘 살려내지 못했다는 것인데 심지어 <오메가맨>에 대해서는 “원작과 너무 달라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해머 영화사에서 직접 영화 각본을 쓰려고도 했다.
그런데 아키바 골즈먼이 ‘많이 참고했다’고 언급한 영화가 바로 <오메가맨>이다. 짧은 로맨스를 제외하고는 절망으로 가득 찬 원작과 달리 <오메가맨>은 ‘백신’을 통해 인류가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다. <나는 전설이다> 역시 그러한 로버트 네빌의 자기희생의 드라마로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윌 스미스는 거기서 더 나아가 거의 자포자기한 삶을 사는 원작의 주인공과 달리 매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등 자기 관리를 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곧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매일 한낮, 두 동강난 브루클린 다리 옆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라디오 방송을 하며 ‘You are not alone’이라는 말로 끝맺는 그의 모습은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사람의 그것이다. 그를 구하러 온 ‘안나’ 역의 앨리스 브라가가 <시티 오브 갓>(2002), 이른바 ‘신의 도시’에서 온 배우라는 사실도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전설이다>는 <블레이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등에서 목격했던 것처럼 변종인간들과의 거대한 사투로 점철된 액션블록버스터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맨 인 블랙>(1997∼) 시리즈와 <아이, 로봇>(2004)에서 인간이 아닌 적들과 대결을 벌였던 윌 스미스의 모습은 좀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진짜 ‘어른’이 된 윌 스미스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프랜시스 로렌스는 변종인간들과의 대결 역시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낮과 밤, 빛과 어둠 사이를 교차하는 지점의 서스펜스에 몰두한다. 그만큼 영화는 로버트 네빌 개인의 내면의 풍경화를 그리는 데 더 집중한다.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슈렉>의 모든 대사를 외고 있는 그의 모습은 흥미롭다. 프랜시스 로렌스가 <콘스탄틴>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전설이다> 역시 신(神)을 신뢰할 수 없는 시대의 구원과 자기희생의 드라마로 완성됐다.
“생존 인물 중에 전설을 들자면 넬슨 만델라가 아닐까”
배우 윌 스미스, 감독 프랜시스 로렌스, 각본&제작 아키바 골즈먼 인터뷰
-어떤 방식으로 작품에 접근했다. =윌 스미스: 프랜시스, 아키바와 거의 800시간 이상을 함께하며 모든 장면 하나하나를 논의하고 회의했다. 네빌 역을 이해하고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서 질병관리본부에도 직접 가서 바이러스에 대한 오랜 조사와 많은 연구를 했다. 또한 영화를 위해서 약 15kg을 뺐다. 이렇게 말라본 건 정말 16년 만에 처음이다. (웃음) 영화 내내 몸무게를 유지해야 했는데 매일 달리고, 철봉에 매달리기를 하면서 유지했다. 상당히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아키바 골즈먼: 한 인물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새로운 도전이다. 원작이 상당히 유명한 소설이라서 오래전에 두편이 먼저 제작되었는데, 영화가 영감을 받은 것은 원작뿐만은 아니었고 두편의 영화 중 <오메가맨>을 많이 참고했다. 약 10년간의 개발기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윌 스미스: 사슴을 쫓아서 함께 살아남은 개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사랑하는 개를 살리기 위해서 따라들어갈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그러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는, 공포심과 애정이 공존하는 심리를 극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프랜시스 로렌스: 혼자 남은 생존자의 외로움과 그의 정신상태와 심리상태를 그린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고독한 영웅의 여정이라는 점에서 나의 이전작 <콘스탄틴>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밥 말리의 <Legend> 앨범을 영화에 등장시킨 것은 좋은 아이디어다. =윌 스미스: 물론 밥 말리를 좋아한다. 죽은 뒤에도 그의 음악과 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고 또한 계속 불리며 이어진다. 영화에 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밥 말리의 앨범 표지를 접하게 됐다. 알다시피 앨범 제목 자체가 ‘Legend’ 아닌가! 묘하게 영화의 느낌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당장 감독과 제작자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디어를 냈다. 그의 노래는 인종차별이나 사람들 마음에 있는 미움이나 시기에 대한 강한 반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그 정신이 상당히 마음에 들고 동의한다. 그래서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인물들을 진심으로 전설로서 존경한다. 생존하는 인물들 중에서 전설을 들자면 넬슨 만델라가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원작과 비교하자면 좀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프랜시스 로렌스: 영화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희망을 가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람이 곤경에 처하게 되면 무언가 붙잡고 싶은 게 있게 마련이다. 안나는 그것이 하나님이었고 네빌에게는 과학이었다. 안나는 신에게 의존하면서 위안을 찾고 네빌이 살아가는 이유는 필사적으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서다.
-영화처럼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는 인간이 된다면. =윌 스미스: 난 어렸을 때부터 대가족들과 살았다. 항상 방을 남자 형제들과 함께 쓰고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온다는 건 정말 최악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