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다. 대선의 진동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충무로가 결국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BBK 검찰 수사 결과 무혐의로 판정되면서 확실시되는 정권교체의 분위기에 영화인들도 움직이고 있다. 지지선언이 잇따르는 한편, 새로운 정권을 맞아 자신의 운명도 새롭게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나돌고 있다. 영화인들의 정치참여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의 움직임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그들의 정치적인 입장이 변칙적인 과정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소신있는 한표의 행사로는 허기를 느끼는 몇몇 충무로 영화인들의 움직임을 살펴봤다.
지난 12월5일, 한국대중문화예술인복지회 소속 연예인들은 한나라당 당사에 모여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공개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앞서 이경호 예술인복지회 이사장은 자신을 포함한 지지선언 연예인 39명의 명단을 공개했고, 지지선언문을 통해 “대부분 대중문화 예술인들의 삶은 역대 정권의 왜곡된 문화정책과 복지정책의 결과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에다 사회보장제도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그 대안으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기자회견 당일 명단에 있던 박진희, 김정은, 홍경민, 정준호, 에릭 등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적이 없다”고 밝히면서 이경호 이사장이 독단적으로 후배 연기자들의 이름을 넣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이경호 이사장은 <씨네21>과의 전화통화에서 “배우들에게 100% 동의를 얻었는데, 개인사정이나 가족들의 반대 때문에 이름을 빼달라고 해서 빼주었을 뿐이다. 한명의 배우라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명단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했다(<씨네21> 632호 국내뉴스 참조). 하지만 이틀 뒤인 7일에는 드라마 <대조영> 종방연에 참석한 최수종이 “힘든 동료연기자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느냐고 해서 그랬다고 했을 뿐인데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여져 당황스러웠다”고 말했고, 차태현은 자신의 팬카페에 올린 글을 통해 “우리의 진심과는 벌써 멀어졌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 자리까지 가서 나랑 재욱이 형은 들어가지 않았다”며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훈, 소유진, 이지훈, 김재원 등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을 것”이라고 난감한 심정을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 대해 한나라당도 뾰족한 해명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이영호 노동총괄단장은 “이경호 이사장을 통해 지지선언을 철회한 배우들에 대해서는 우리도 정정발표를 했다. 하지만 그외 다른 형태로 지지를 철회한 배우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봉사활동으로 알고 참여했던 배우들은 “지지한 적이 없으니 철회할 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영화의 위기는 ‘무능한 진보’ 탓”… 영진위를 타깃 삼기도
일종의 해프닝으로 볼 수 있는 이런 사건뿐만 아니라 교묘한 움직임도 있다. 지난 11월20일, 홍천 비발디파크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인원로회의 주최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영화인 대토론회’가 열렸다. 100여명의 원로영화인들이 참여한 이날 토론에 대해 최지희 영화인원로회 이사장은 “원로영화인과 후배영화인이 대화의 장을 열어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고 의도를 밝혔다. 하지만 정용탁 한양대 교수와 조희문 인하대 교수, 최공재 독립영화 프로듀서, 김종국 홍익대 겸임교수가 발제자로 나선 이날 토론회는 사실상 “현 영화진흥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는 자리였다”는 게 중평이다. 발제문에 따르면 정용탁 교수는 “현 한국 영화계는 기성 영화인들이 젊은 영화인들의 기세에 눌려 있던 터라 50대, 60대 영화가 괴멸되었다”며 “현재 한국영화의 위기는 정치적 성향이 짙은 무능한 인물들이 영화계를 주도했기 때문이며, 영화진흥기관을 민간이 운영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주장했다. 신구세대의 화합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정치적, 이념적 갈등을 강조한 건 조희문 교수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오늘날 한국 영화계 내부에 존재한 갈등의 바탕에는 이념적 지향을 달리하는 시각이 작용하며, 주도적인 힘을 가진 쪽에서 강조하는 영화는 이념적 선전과 선동을 가장 중요한 역할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현재의 영화진흥위원회가 기존의 영화계와는 이념적 지향을 달리하는 영화인들의 관리로 넘어가면서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거칠 것 없이 확산되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지난 10여년은 영화계 입장에서는 과다한 분열과 갈등으로 보낸 시간이다”라고 강조했다.
토론에 참석한 몇몇 영화인들은 이날 토론이 “한나라당에 줄서기를 하려는 사람들의 정치적 발언장”이었다고 비판했다. 토론의 사회를 맡았던 오동진 동의대 교수는 “토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차기 정권에서는 자기 몫을 가져오겠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뚜렷했다”고 비판했으며 이날 토론에 참여한 한 영화관계자도 “차기 영진위를 장악하려는 세력들이 원로들이 가진 박탈감을 이용해 정치적인 발언을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토론을 주최한 원로회쪽은 “원로들을 현장에서 소외시킨 영화진흥위원회에 불만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념적인 부분은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박영실 원로회 부이사장은 “원로영화인 입장에서는 영진위와 감정이 대립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조희문 교수에게 발제를 의뢰한 것은 그러한 원로들의 이야기를 대변해주기를 바랐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일부 영화인의 소외감에 호소해
사실 정권교체 이후 영화계의 재편구도에 대한 설왕설래는 이전부터 있어왔다. 차기 문화관광부 장관은 누가 유력하다더라, 어떤 영화인은 벌써 어느 캠프에 붙었다더라, 어느 캠프에 붙었던 영화인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다더라 등등. 한 영화관계자는 이번 선거를 둘러싼 영화인들의 정치적 행동이 “정치적인 소신이라기보다는 살아남고 싶은 욕망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에 휘말리고 싶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이용해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비뚤어진 전략 또한 그런 욕망에서 나타난 것일까. 물론 이들의 정치적인 갈망이 12월19일 이후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만약 정권이 교체될 경우, 영화계가 어떻게 재편될지를 그리는 것도 지금으로서는 추측일 뿐이다. 하지만 대선을 향한 충무로의 이러한 변칙적인 진동은 매우 씁쓸해 보인다.
“영진위가 원로들을 등한시해 그동안 불만이 컸다”
박영실 한국영화인원로회 부이사장
-이번 토론은 어떤 취지로 주최한 것인가. =주제 그대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또한 영화계에 있는 신구 세대의 갈등을 해소하는 움직임의 시작이 되고자 했다. 아무래도 현재의 영화인들과 과거의 기성 영화인들 사이에는 꽤 먼 거리감이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가 먼저 대화를 제의한 것이다. 벽을 무너뜨리고, 한국영화를 위해서 힘을 합쳐보자는 뜻이다. 나름대로 원로회 회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발제에 나선 영화인들은 어떻게 선정했는지. =발제자와 패널들 모두 우리가 먼저 선택해서 추진을 했다. 우리가 이런 행사를 하면 젊은 층에서 많이 동참해주기를 바랐는데, 사실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정용탁 교수와 조희문 교수 등이 도와줘서 잘 치른 것 같다.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이나 이준동 나우필름 대표도 와주었고.
-발제의 내용이 모두 현 영진위에 대한 지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원로회에서도 영진위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것인가. =기본적으로 불만이 있는 건 사실이다. 우리가 볼 때는 그동안 영진위가 한국영화를 잘 이끌어온 것 같기도 했지만, 정작 한국영화의 뿌리인 우리를 등한시한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원로영화인들의 기분이 안 좋았던 게 많았다.
-정용탁 교수나 조희문 교수가 지적한 특정 영화인들의 이념적인 성향도 원로회가 가진 불만인가. =조희문 교수가 발표한 것은 ‘한국 영화계의 갈등과 대립의 계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토론에서 영진위의 구성과정과 역사를 짚다보니 나온 것 같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 토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주류 영화인뿐만 아니라 독립영화계와 현장스탭들을 참여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