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감독 최은희
출연 최은희
<EBS> 11월4일(일) 밤10시10분
“신랑이 어려서부터 여색을 맛보기 시작하면 오래 못사는 법이다. 명심하거라.” 이 대사는 누구 몫일까? 시아버지일 것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근엄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앉혀놓고 읊는 대사 중 일부다. 이는 한국사회의 유교적이고 가부장적 의식을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이 재생산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억압당하고 어느 견지에선 착취당한 역사를 여성이 같은 ‘여성’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민며느리>는 최은희 감독의 영화다. 배우 최은희를 1960년대 최고 스타로 칭하는 것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전통적 여성상, <쌀>(1963)과 <상록수>(1961)의 신여성에 이르기까지 배우 최은희의 페르소나는 다양하다. 그런데 ‘감독’ 최은희의 존재는 한국영화사에서 그다지 인상깊게 각인되지 못한 것 같다. <민며느리>는 당시 남편인 신상옥 감독이 제작자로 나섰으며 원작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어린 신랑 vs 조숙한 신부’ 모티브를 간직하고 있는 이 영화는 고부간 갈등구조를 꼼꼼하게, 때로 섬뜩한 감이 배어날 정도로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민며느리>에 대해 최은희 감독은 “배우가 아닌 연출자로서 한국 여성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부잣집 민며느리가 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친정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인데 시집 어른들을 위해 씨암탉 등을 틈틈이 챙겨야만 한다. 나이 어린 신랑은 신부와 친구처럼 지내지만 주변인들 속을 썩이는 말썽을 부린다. 하지만 신부가 곤란을 겪을 때면 나서서 변호해주고, 어른스럽게 챙겨주기도 한다. 시어머니의 횡포에 맞서서 신부를 보호하는 경우도 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하인을 부리듯 독하게 대한다. 시어머니 성화를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결국 시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제작자였던 신상옥 감독의 여느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최은희 감독은 <민며느리>에서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살려낸다. 치밀하게 짜여진 캐릭터에 의존하면서 드라마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시어머니 성화는 대단하다. 몸져 누운 며느리 앞에 약을 내밀면서 “빨리 나아야지. 그런데 내일 외출할 때 입을 저고리를 오늘 안으로 만들어라”라고 명한다. 며느리는 끙끙 앓으면서 눈물을 훔치곤 한다.
영화가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루하다 싶을 만큼 한국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안주하려는, 관습적인 허점을 노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며느리>는 한 여성의 내면을 과장이나 사족없이 투영하고 있다. 그녀가 철없는 남편을 아들처럼 보살피고, 시부모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아가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깊은 감흥을 자아낸다. 영화엔 당대의 스타인 김희갑, 황정순, 서영춘 등이 출연하고 있는데 이들의 연기대결도 이채롭다. 스타시스템을 활용하고, 지극히 관습적인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최은희 감독은 당시 여성‘관객’과 감성적으로 소통하는 법에 정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