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대사, <트랜스포머>
“나는 옵티머스 프라임이다!”
<트랜스포머>는 국내 박스오피스 역사를 트랜스폼(Transform)했다. 개봉 5일 만에 200만명 돌파. 11일 만에 400만명 돌파. 17일 만에 500만명 돌파. 결국 영화는 21일 만에 600만명을 돌파하며 수입영화 흥행의 상한선이라던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596만명을 격파했고, 737만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최종 관객 수를 기록하며 수입영화 사상 최고 흥행작의 지위를 쟁취했다. <트랜스포머>는 디지털 특수효과가 창조한 규모의 법칙을 카피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완벽하게 무력화하는 할리우드의 무기다. “나는 옵티머스 프라임이다!”라는 간결한 기계로봇의 통성명은 “그레타 가르보가 말한다”던 옛 할리우드 유성영화의 광고문구와도 비견할 만하다. 이제 영화가, 아니, 할리우드가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기술만 카피하려는 뱁새들은 이무기에게 먹힐 뿐이(었)다.
올해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디 워>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이무기
아마도 한국 영화계 최고의 사건을 꼽으라면 <디 워>를 둘러싼 논란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영화 흥행의 이면에서 애국심 마케팅, 할리우드를 향한 뜬구름, 평론가와 네티즌의 혈투, 국내 CG기술의 현재 등 여러 이야깃거리들을 양산했다. 특히 한 TV 토론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진중권 교수의 발언은 줄줄이 어록에 등재됐다. ‘비평할 가치조차 없는’ <디 워>를 얘기하면서 그는 종종 ‘꼭지가 돌았고’ 결국 핼리혜성까지 들먹이며 그 허술한 이야기 구조에 대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말까지 꺼냈다. 그것은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 작가들이 곤경에 처한 주인공을 어떻게 구해낼지 모를 때 갑작스레 등장시키는 배우를 뜻한다. 어쩌면 <디 워> 역시 난데없이 등장한 절름발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미학보다 기술의 우위 혹은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의 경제논리에 침식당한 문화계의 한 단면을 보여준 씁쓸한 사례였다.
올해의 슈퍼히어로, <검은집>
신이화, 그녀는 분명 사람이 아닐 거야
사치코와 신이화가 동일 인물일 수 없다는 것은 유선이 캐스팅되면서 분명해졌다. 기시 유스케의 소설 <검은집>의 사치코는 조각칼로 그어놓은 듯 찢어진 눈을 가진 뚱뚱한 중년 여자다. 그러나 영화 <검은집>의 신이화는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촉발시키는 처연한 여인이다. <검은집>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야리야리한 손모가지로 어른 남자를 주욱주욱 끌어당기는 신이화의 초자연적인 괴력과 배우 유선의 육체는 도무지 조화롭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가 올해의 슈퍼히어로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드럼통 맞고 나뒹구는 살인마를 놔두고 최대한 느리게 도망치기 신공’으로 관객의 인내심을 짓이기던 전준오(황정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유선과 황정민의 탓이라는 건 아니다.
올해의 목소리, <그놈 목소리>
공포는 전화선을 타고
<그놈 목소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움직인다. 아직까지도 잡히지 않은, 영화 속에서도 어렴풋한 원경으로만 보이는 그 범인의 협박전화 목소리는 영화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영화는 다른 캐릭터들과 에피소드들은 모두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지만, 유독 잡히지 못한 범인에 관해서만은 실제 사건에 근거한 객관성을 심어놓았다. 실제 범인의 협박내용과 말투, 대사까지도 그때 그 기억과 별로 다르지 않다. 본래 내레이션이 부연과 첨가 혹은 주인공 내면의 또 다른 표현의 기능을 갖는다면 그 목소리는 모든 캐릭터들을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목소리에 가깝다. 극영화의 규칙을 교묘하게 교란하면서 스크린에서 시각을 소외시키는 독특한 체험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 장면만큼은 방송사 PD 시절부터 다큐멘터리에 관한 한 탁월한 변칙 감각을 소유한 박진표 감독의 시도가 돋보인다.
올해의 드레스
칸의 여왕, 전도연의 황금 드레스
“사실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이런 거짓말쟁이. 전도연의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은 왠지 거짓말 같았다. 아니 세상에,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랄프 로렌의 드레스를 입고서 어떻게 스스로에게 그런 최면을 걸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분명히 ‘승자가 입는 드레스’였고, 최소한 ‘승리를 직감한 자가 입는 드레스’였으니 말이다. 결국 황금의 드레스는 승자의 드레스가 됐고, 칸에서 돌아온 전도연은 청룡상, 영평상, 대한민국 영화대상을 비롯한 2007년 국내 영화제의 여우주연상마저 완벽하게 휩쓸어갔다. 올해 인터넷을 달아오르게 만든 국내 여배우들의 과감한 드레스들이 거의 모조리 황금색을 피해간 것도 당연한 일. 황금은 오직 여왕만이 입을 수 있다.
올해의 귀신, <기담>
처녀 귀신보다 무서운 ‘엄마 귀신’
올해도 한국 공포영화의 기적적인 대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 일본 공포영화의 음산한 기운을 품었던 <기담>은 사다코의 망령을 의식하지 않은, 올해의 의미있는 발견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영화 속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한 ‘엄마 귀신’ 역의 박지아는 <여고괴담>(1998) 이후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귀신으로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아래 잔뜩 핏발이 선 눈, 그리고 어느 틈엔가 딸의 곁을 지키고 섰던 그녀의 모습은 딸을 연기한 고주연의 무시무시한 눈물연기와 어우러져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박지아가 김기덕 감독의 영화 <해안선>(2002)과 <숨>(2007)에서 바로 정신착란 상태의 여자를 연기했다는 사실까지 연상 작용을 일으키면 그 공포감은 배가됐다. <여고괴담>에서 축축한 복도를 무지막지한 점프컷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던 최강희 이후 이토록 우리를 소름 돋게 만든 귀신은 없었을 것이다.
올해의 므흣, <색, 계>
이보다 더 야할 순 없다
리안 감독은 분명 어떤 고고한 작가적 지위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장 대중적 호흡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사실상 전체적으로 ‘특정’장면들의 연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색, 계>가 어떤 방식과 무드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지를 꼼꼼히 되짚어보는 것은 그에 대한 해답을 줄 것이다. 양조위와 탕웨이는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보다 함께 살을 섞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영화 내내 그들은 각자의 목적이야 어쨌건 서로를 탐하고 또 탐한다. 중국의 한 전문의가 흉내내지 말라고 했던 고난이도의 체위는 물론 숨이 멎을 만큼 갑작스레 등장하는 중요 부위까지, 올해 가장 관객을 숨죽이게 만든 ‘색’의 영화가 바로 <색, 계>다. 그것은 1차원적인 노출 수위가 낳은 결과가 아니다. 결국 리안 감독은 색이란 것이 ‘연출’을 통해 극대화되는 것임을 보여줬다. 어쩌면 그것이 <색, 계>가 던져준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올해의 미소녀, <훌라걸스>
아오이 유우는 예쁘다
21세기 일본영화 마케팅의 첫 번째 법칙? 당연히 ‘미소녀 세일즈’다. 특히 이상일의 <훌라걸스>는 미소녀 세일즈의 극점에 도달한 영화로, 탄광촌의 감동도 좋지만 정작 중요했던 것은 ‘아오이 유우의 춤’과 ‘아오이 유우의 사투리 연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마지막 훌라춤 장면은 가히 ‘소녀 스펙터클’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아오이 유우는 홀로 한국 영화지의 커버를 차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본 여배우이기도 하지만 한국 여배우들의 셀프 마케팅과 패션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배두나 사진집과 정려원 스타일의 기원? 봉준호가 신작 <흔들리는 도쿄>를 위해 아오이 유우를 불러들인 까닭? 지금 아오이 유우는 한국 대중문화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