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이 만나고 말았다. 무슨 일이건 매사를 부정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남자와 무슨 일이건 매사를 긍정적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소녀가 만났다. 세상에 절망한 남자는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 가지에 목을 매지만 소녀는 그를 끌어내리며 “키를 쭉 늘이려는 거였죠?”라고 묻는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 도산하고 빚더미에 올랐을 때 그처럼 “키를 늘이려”했다며.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각자의 절망/낙관의 안드로메다에 사는 주인공들이 그렇게 만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는 이토시키 노조무라는 이름의 학교 선생이고, 소녀는 그가 담임을 맡은 반의 학생, 후우라 카후카였다. <안녕, 절망선생>은 그런 엉뚱한 인물들이 제각기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담임 선생이 절망을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으니, 진로 희망 조사는 진로 ‘절망’ 조사로 둔갑한다. 될 리 없는 것을 쓰는 식이다. 축구부 소속이지만 실력을 충분하지 않은 학생은 ‘세리에 A’와 ‘일본대표’, ‘J리그’를 쓴다. 그러고 보니 그야말로 자유롭고 원대한 꿈을 갖게 되는 셈이다. 기묘하게도 그의 절망은 현대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에 반항해 생겨난다. 그래서 그의 절망어린 한마디는 학생들을 절망에서 구하기도 한다. 분수에 맞는 소망을 갖도록 교육받는 한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꿈을 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히키코모리 학생에게 자꾸 밖으로 나오라고, 사람들을 만나라고 강요하는 것보다는 절망선생의 “죽고 싶어지면 우선 선생님께 말하도록 해요”라는 말이 더 효과적이다. 하지만 절망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후우라의 막무가내 낙관주의는 묘한 균형을 잡는다. 이를테면, 절망선생은 연하장을 보낼 때, 새로 산 휴대전화의 주소록을 정리할 때 무심코 이 사람 저 사람을 잘라버리고 삭제해버리는 일에 절망한다. 후우라는 그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말한다. “단순한 FA예요. 새로운 무대에서 활약하라고 뒤에서 밀어주는 거예요.”
<안녕! 절망선생>은 절망과 희망, 비관과 낙관 중 어느 쪽이 옳다거나 더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작가 구메타 고지는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는 일들을 두명의 극단적인 캐릭터와 그들을 둘러싼 더더욱 극단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하나하나의 사건은 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라 읽다 보면 이쪽의 말에도 저쪽의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킥킥대며 동의하게 된다. 절망선생은 부모 모르는 일이 너무 많아지는 세상에 절망하고, 늘 “고객을 위해”라는 이름으로 고객의 주머니를 여는 광고들의 생색내기에 절망한다. 그리고 절망한들 무엇이 나쁜가. 웃음을, 행복을, 낙관을, 더 부유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기만 한 세상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절망을 낳는 건 아닌지. 절망이 절망을 낳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안녕! 절망선생>이 던지는 의미있는 물음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