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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젊은 베르테르의 산만함 혹은 활력

윤성호의 주목할만한 장편 데뷔작 <은하해방전선>

“가련한 류영재의 이야기에 관해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열심히 모아서 여기 여러분들 앞에 내어놓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내게 감사하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류영재의 정신과 성품에는 표정과 거리를, 그의 운명에는 웃음을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류영재의 슬픔에서 위안을 얻으십시오. 그대가 운명 때문에 또는 그대 자신의 잘못으로 절친한 애인을 찾지 못한다면 부디 이 조그마한 영화를 그대의 애인으로 삼아주십시오.”

직업이 영화감독인 류영재라는 청년이 실연 뒤에 혹은 영화 촬영 직전에 겪는 심정과 생활을 다룬 영화 <은하해방전선>, 그걸 만든 감독 윤성호가 우리를 위해 써두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어떤 서문, 그러나 실은 결코 그가 쓴 적이 없는 이 영화의 서문을 마음대로 상상하자면 위와 같다. 이 위조된 서문은 윤성호가 그의 영화에서 즐겨 하는 것처럼 독일의 대문호가 쓴 고(古)소설의 서문에서 지금 막 베껴와 작성한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윤성호식으로 영화화한다면

원문은 아래와 같으며, 같은 호흡으로 다시 한번 읽기를 권한다. 윤성호는 “이렇게 두번 말하는 걸 운동”이라고 부른다. “가련한 베르테르의 이야기에 관해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열심히 모아서 여기 여러분들 앞에 내어놓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내게 감사하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베르테르의 정신과 성품에는 감탄과 사랑을, 그의 운명에는 눈물을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위안을 얻으십시오. 그대가 운명 때문에 또는 그대 자신의 잘못으로 절친한 친구를 찾지 못한다면 부디 이 조그마한 책을 그대의 친구로 삼아주십시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쓴 짧은 서문 중 베르테르를 류영재로, 감탄과 사랑을 표정과 거리로, 눈물을 웃음으로, 친구를 애인으로, 책을 영화로 바꾸면 <은하해방전선>의 상상적 서문이 된다고 나는 지금 우기고 있다(<은하해방전선>에는 원래 진짜 서문이 있었지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뒤에 삭제됐고 극장판에서는 볼 수 없다. 삭제된 서문의 내용을 밝히는 대신 나는 상상의 서문에 기초하여 계속 발언할 것이다).

물론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한 운명 탓에 숭고한 실연의 끝에 이른 것이라면 류영재는 자기보다 자기를 더 많이 사랑하는 여자(은하)가 곁에 있었는데도 그 좋은 운명을 깨닫지 못한 이기적인 바보스러움으로 실연당했다. 베르테르의 실연은 가슴이 아프지만 류영재는 실연을 당해도 싸다. 그렇게 이야기로서 두 연애담의 처음과 끝이 다르긴 하나, <은하해방전선>의 정념은 연애의 시련이 가져오는 원초적인 것이기에, 결국 사랑하고 연애하는 자의 상태를 묘사한 절대적 고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지금 상기시킨다.

좀더 구체적인 이유도 있다. 윤성호는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2005년에 만들어진 단편 제목)라고 시련의 상태를 토로한 적이 있는데, 평소 습관으로 볼 때 이 제목도 출처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연인지, 롤랑 바르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쓰인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라는 문형을 자신의 저서 <사랑의 단상> 49번째 단상의 소제목으로 지은 뒤 “견딜 수 없는 것: 사랑의 고통의 축적된 감정이 드디어는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란 외침으로 폭발하는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윤성호가 이 문구를 모르거나 바르뜨에게 빌려오지 않았더라도 실은 상관없을 것이다.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라는 문형을 포함한 <사랑의 단상>은 사랑에 관한 전무후무한 메타 해설서이고, 이 해설서의 동기가 된 것은 다름 아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실연한 자의 정념을 다룬 고전으로 유명하고, 윤성호는 여전히 현대에서도 통하는 단 하나의 고전 세계의 담론 즉 사랑의 담론 내에서 실연이라는 사태를 마주한 자의 정념을 얼마간 그려왔고, 그러다 결국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라고 괴테와 바르트처럼 중얼거린 바 있고, 지금은 그렇게 말한 단편의 내용을 복습하고 총합하는 형태로 연애에 관한 첫 장편을 만들었고, 그 안에는 실연당해 어쩔 줄 몰라하는 영재가 있다. 다름 아니라 이런 식의 기나긴 연상법과 연쇄법으로 엮을 때 세계 전체의 매트릭스가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 예전부터 윤성호가 믿어온 논리다. 그러니 내가 지금껏 꼭 우긴 것만은 아니며, <은하해방전선>의 쓰여지지 않은 부제를 <젊은 베르테르의 산만함> 또는 <연애의 단상>이라고 붙여도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이다.

윤성호의 끊임없는 분신술

좀 궁색해진 베르테르, 즉 영재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낼 것이다. 그럼 누구에게 어떤 편지를 보낼 것인가. 그리고 누가, 무엇이 영재의 로테인가. 영화에서 영재는 배창호의 <러브스토리>에 나왔던 “영화는 감독이 관객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라는 대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영화는 이메일쯤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걸 영재가 아닌 윤성호의 소신으로 믿어도 될 것이다. 영화가 연애편지라는 말이 사실일 때 나도 관객의 한 사람이어서 그 편지를 받았다. 하지만 받아보니 윤성호가 영재를 시켜 관객인 내게 쓴 건 ‘연애’ 편지가 아니라 ‘연애에 관해 말하는’ 편지다. 베르테르의 편지의 수신인은 친구 빌헬름이고 영재의 편지를 받는 우리가 빌헬름이다. 베르테르는 빌헬름에게 로테와의 연애 이야기를 하고 영재는 우리에게 은하와의 연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영재에게 로테는 하나 더 있고 그게 영화다. 그래서 영재는 우리에게 영화 이야기도 한다.

윤성호/영재의 로테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건 이처럼 어렵지 않다. 중요한 건 영재를 시켜 편지를 쓸 때 윤성호가 손오공이 된다는 점이다. <은하해방전선>은 윤성호 개인의 연애사에서 출발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윤성호의 연애와 영재의 연애가 얼마나 같은지 말하기는 어려워도 영재가 윤성호의 분신이라는 건 짐작이 간다.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이 홍상수와 닮아 보이는 건 닮아진 것이지만 윤성호의 영화에서 임지규가 영재로서 그를 닮은 것은 닮도록 꾸며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영재 7호”, “영재 8호” 하는 식으로 분신들을 지칭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런 점에서 영재는 윤성호의 ‘아무개호’쯤 되는 분신일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자연인 윤성호가 있다->본인이 연출한 단편에 그동안 배우로 출연한 윤성호가 있다->단편에서 배우 윤성호가 맡았던 역할을 대신하는 장편 <은하해방전선>의 임지규가 있다->윤성호와 임지규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영재가 있다->영화감독 영재가 있다->은하의 영재가 있다->은성의 영재가 있다. 이 화살표의 방향을 따라 윤성호는 자기의 머리털에서 나온 인물, 영재의 캐릭터로 분신술을 부린다.

윤성호는 영재가 만들려고 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도 분신술을 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으로 옮겨다니며 오려졌다가 붙여졌다가 난리 법석이다. 처음에 영재는 실어증에 걸린 남자가 잠이 오지 않는 재주를 갖게 된 뒤 타짜가 되고 어쩌다 북한으로 넘어간다고 말한다. 그걸 듣던 한국어를 잘 못하는 스탭은 자기도 시나리오가 있다며 김일성을 연인으로 사모했던 좌파 정치혁명가이자 북한 무당이 어쩌다 남한에 내려와 경상도 귀신에 씌어 땅값 오를 곳을 맞히는 재주를 갖게 되어 재테크의 귀재가 되는 이야기라고 영어로 말한다. 영재는 다시, 잊혀진 개그맨이 샴쌍둥이 자매 중 한명을 사랑하는 이야기라고 덧붙인다. 그리고 나서는 이건 내 성장기를 은유하는 영화라며 80년대로 시작하겠다고도 말한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그럼 80년대에서 70년대로 옮기자며 박정희 경호원 이야기로 설정을 바꿔버린다. 혹은 제작자는 가수가 성대를 다쳐 소리가 안 나오고 그러다가 쌍둥이 자매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이야기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결국 영재가 캐스팅하고 싶어했던 배우 기무라 레이를 채간 어떤 기성 감독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이 다 섞인 것 같은 영화 내용을 발표한다. 영재는 1년 뒤 영화를 만들게 되지만 그게 어떤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은하해방전선>이란 영재가 만드는 영화 제목이 아니라 영재의 영화 속 인물인 몽골의 쌍둥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제목이다. 영재의 영화는 제목이 없고 그 이야기는 알 수 없다.

윤성호는 여기에 본인의 과거 단편에 나온 장면과 대사들의 분신술까지 덧붙인다. 극장 안에서 상영되는 첫 번째 영화는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이고, 두 번째 상영하는 영화는 아마도 윤성호의 졸업영화인 <졸업영화>인 것 같다. “몸이 마음 따라 가는 건지 마음이 몸 따라 가는 건지”라는 대사도, “섹스가 해주는 것인지 하는 것인지”라는 말싸움도, “연애와 영화의 공통점은 응석”이라는 명제도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과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에서 이미 보았던 것들이고, 약간씩 차이진 맥락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분신술에는 그런데 견디지 못할 통증이 있다. 윤성호의 분신 영재가 겪는 실연의 상태는 이미 떠나버린 은하와의 관계 속에서 하염없이 미끄러지고 지속된다. 새로운 연인 은성을 만날 때까지 계속된다. 이야기의 분신술이 덧붙여질 때는 아예 영재와 영화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영화 제작은 기약없이 지체된다. 윤성호가 만든 과거 영화의 대사와 장면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그때 던졌던 질문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이기 때문이다. 영재 입장에서 보면 은하와의 연애도 영화와의 연애도 둘 다 잘 안 되는 경우고, 윤성호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반복이나 회귀나 복제술이라고 표현하는 대신 분신술이라고 부른 이유는 돌아오고 늘어난 이것들이 윤성호/류영재의 심리적인 잉태에서 비롯된 무수한 생명체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윤성호식 떠들기의 기원

분신술을 가능케 하는 비장의 의천검이 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쉴새없이 떠들기’라는 이름의 방법론이다. 윤성호 영화에서 떠들기란 귀를 막을 일이 아니라 주목해야 할 행위다. 캐릭터, 이야기, 자기 인용과 참조로 떠드는 것이다. 말을 하고 못함이 중요해지는 것도 바로 이때다.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되는 사고도 실은 떠드는 것만큼 중요하다. 인물들은 게다가 말을 할 때 그냥 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영어로, 사투리로, 립싱크로, 복화술로, 마이크로 하는 건 말의 분신술이다. 이건 물론 말이 옮겨질 때의 장애를 의식한 또 다른 분신술인데, 오역되거나 불통되면서 농담의 형식으로 드러나지만 이때 강조되는 건 횡행하는 말의 권력이다.

예컨대 영재가 실어증에 걸리자 두 가지 오역이 발생한다. 녹음기사는 영재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혁권은 자기가 새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뻥을 친다. 영재의 입이 되어준 사람들의 말이 영재의 의도를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쉽게 믿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더 심해지고 술이 들어가면 정확성이 없는 말이 동의를 얻는 희한한 상황까지 벌어진다. 주마간산 격의 평론가와 어느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여자가 서로 “그러니까 그게 그거구나”라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자 녹음기사는 참지 못하고 “그래서 그게 뭐냐고” 따진다. 이 영화는 개별의 말들을 믿지 않는다. 다만 전체를 떠들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인물들의 개별 대사가 아니어도 영화의 말인 숏과 신으로도 떠든다. 영재와 은하가 여관에 누워 있는 장면을 보여주기에 앞서 은하장이라는 여관 간판의 인서트를 보여주는 건 숏으로 떠드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윤성호의 영화적 떠들기가 어떤 기원을 추측하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윤성호가 단편영화에서 박남철, 오규원, 황지우 같은 시인들의 문장을 긴요하게 인용하거나 변형 복습할 때 자기 영화의 방법적 기원을 밝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윤성호의 영화는 80년대 혹은 90년대 초에 한국 문단에 주요하게 영향을 끼쳤던 시인들의 인유법을 떠올리게 한다. 혹은 윤성호의 영화에서 박남철의 안 띄어쓰기가, 오규원의 혼성모방이, 황지우의 문장의 이미지화가 느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윤성호는 이 시인들의 작법을 알게 모르게 자기 수다의 한 기원으로 삼는다. 물론 <은하해방전선>에는 이 시인들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거명되지 않으며 단편보다 덜 속내를 드러낸다. 하지만 영재는 은하에게 자신이 “민주화 세대에 무임승차한 좌파인 것 같다”고 뜬금없이 말하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민주화 세대에 큰 영향을 끼쳤던 문학적 방법론에 윤성호가 빚지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은하해방전선>은 띄어쓰기가 없는 것처럼 속사포같이 신을 구성하기도 하고, 갑자기 서사의 진행을 벗어나 다른 엉뚱한 이야기를 보여주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별안간 정치사회에 대해서 코멘트하기도 한다. 혼성모방적이기도 하고 메타적이기도 하다. 윤성호는 어쩌면 지금 자기가 읽은 시들을 영화로 베껴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여기 한 가지가 추가된다. 다른 기술 즉 음악으로 떠들기다. 영재가 실어증에 걸리고 나자 입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은 멜로디이며 그것이 일상의 말을 대체한다. <은하해방전선>에서 희망의 볕이 드는 건 주로 음악이 등장할 때다. 잠시뿐이지만 전철 안의 시민들은 판타지 안에서 노동활동가의 <차오벨라> 연주에 합주로서 공감한다. 제작자와 프로듀서가 영재의 영화를 천재 몽골 감독에게 넘겨줄까 언뜻 고민할 때도, 후경에서 영재가 하는 건 입으로 색소폰 소리를 내며 피아노 연주와 협연을 벌이는 거다. 이건 단지 웃기는 상황이 아니라 말의 배신을 부끄럽게 하는 음악의 순수한 자태이며 아름다운 잼 세션이다. 영재가 스피커를 들고 “모르겠어요…. 여기가 어딘지”라며 레이지 본의 <모르겠어요>를 목놓아 부르고 나니 말이 돌아온다. 영재가 눈치없이 조잘거릴 때 “영재는 말이 너무 많아” 하며 은하가 불러주는 아름다운 노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평온한 장면 중 하나를 연출한다(나도 영재처럼 이 노래의 제목을 잘 모르지만 아름답다. 어쩌면 윤성호가 기대고 있는 또 다른 시인들의 이름을 떠올리게도 한다. 최승자, 기형도, 김수영 등등). 그 노래 때문에 입 닥치고 있어야 한다. 물론 영화 전반적으로 볼 때 음악은 일부러 상투적으로 쓰이거나 리듬을 조율하기 위해 쓰인 경우도 있지만, 결국 음악의 떠들기를 주목해야 하는 건 윤성호가 <은하해방전선>을 통해 관습적인 언어 대신 무언가 다른 언어를 열심히 찾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은 소중하다, 그러나 범상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

윤성호는 캐릭터, 이야기, 자기 참조, 말, 음악의 분신술을 쉴새없이 부린다. 자의적으로 문학의 한 방식을 이해하고 훔쳐온 뒤 시종일관 산만하게 떠들며 전략적으로 전유한다. 그것들로 우물거린다. 자학하고 잘난 척하고, 혐오하지만 슬퍼하고, 놀리면서 도망치고, 그러면서도 주장한다. 그럼 이제 묻고 싶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무엇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닐 때 <은하해방전선>은 그냥 1억짜리 농담이지만 여기에는 찾으려는 ‘그게’ 있다. <은하해방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은 영화나 은하가 아니라 바로 그거다. 그러니까 그거. 그게 뭔가. 그건 소통이다. 소통을 찾기 위해서다.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실망할지도 모르고 이런 주장을 바보 취급할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는 명백히 소통을 놀리고 있는 것 같으며 그건 영화에도 그렇다고 나와 있는 것 같다. 영화에서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나가기 직전 배우 혁권이 이런 자리 처음인데 떨린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실어증에 걸려 말을 할 수 없는 영재는 휴대폰 문자에 “소통, 인간, 뭐 그런 말만 하면 돼요”라고 찍어서 보여준다. 혁권은 그렇게 한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이 말을 풍자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은하해방전선>을 본 뒤 어디 가서 소통 운운하면 이제 바보가 되겠구나, 조심해야지, 다짐하려고 한다. 얼마간 풍자와 조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성호는 범상한 말을 믿지 않는 것이지 소통의 가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은하해방전선>은 소통주의자가 만들 만한 영화다. 소통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이 영화의 소망을 거절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소통이 중요하다, 라고 그냥 말하는 건 아무 효험이 없으며, 전달양식을 바꿔야만 이 말의 의미가 통한다고 윤성호는 믿는 것 같다. 윤성호는 소통을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소통을 주장하는 상습적 양식을 비아냥거린다.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대신, 소/통/이/중/요/하다/라고 스타카토로 끊어서 말한다. 다하요중이통소라고 뒤집어 말한다. 소통이중요하다소통이중요하다소통이중요하다라고 띄어쓰지 않고 말한다. ㅅ ㅗ ㅌ ㅗ ㅇ l ㅈ ㅜ ㅇ ㅇ ㅛ ㅎ ㅏ ㄷ ㅏ라고 헤치고 풀어서 말한다. 소통~샤방샤방~완전중요~막 이래~즐! 이라고 은어로 말한다. 그런 식으로 양식과 화법을 바꿔 말한다. 이런 점이 산만하다는 느낌을 줄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방식이 소모적이고 쓸데없는 유희를 양산하며 거부감을 준다는 지적도 있을 것이다. 동감한다. 때때로 좀 유치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직 결함이 있다 할지언정 소통의 양식을 바꾸려는 이 노력이 ‘전체에 대한 통찰’(김현)을 자기 식대로 감행하는 윤성호식 ‘전체에 대한 산만함’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해 보인다.

마침내 <은하해방전선>은 순수한 속내를 드러낸다. 영재는 은하를 처음 만날 때와 똑같이(도넛가게 장면이 판타지인지 회상인지 영화적으로 분명하지 않지만, 끝장면과 대구를 이룬다고 가정한다면 회상일 것이다) 자기 주머니에 3천원 있으면 다 줄게로 말을 건다. 연애로 소통해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영재는 새로 사귄 연인 은성에게도 은하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다시 써먹는다. 그렇다면 영재의 그 연애 걸기에 반성이란 있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냐고 질책이 터져나올 만하다. 하지만 다르다. 영재가 이번에는 그걸 입으로 말하지 않고 손으로 말한다. 구어가 아니라 수화로 한다. 아니 이런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영재는 은성의 언어를 배워 그녀의 말로 한다. 영재에게 “우리 사이에는 대화라는 게 아예 없었다”(즉 소통이 없었다)고 은하가 알려준 다음 새로 시작한 연애에서 영재는 자기의 언어를 바꾸고 은성과 소통한다. 말을 믿지 않는 연설가. 말없는 솔개를 꿈꾸는 수다쟁이. 말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쓰려는 문학주의자. 말의 의미보다 멜로디를 믿는 음정주의자. 연애의 대상의 영원함을 믿지 않지만 연애편지의 영원한 효력은 믿는 연인 영재가 지금 막 새로운 말을 배운 것이다. 소통의 양식을 바꾼 자는 마침내 해피엔딩을 맞는다.

철학하는 윤성호의 영화를 기대한다

부산의 선술집에서 프로듀서가 실어증에 걸린 박정희 경호원 운운하며 영재의 영화 주인공을 또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갈 때 문득 카메라는 선반 위에 놓인 두 마리의 고양이 인형을 두번 인서트로 보여준다. 다소 모호하지만 아마 카메라는 그 고양이들이 샴쌍둥이가 아니겠느냐고 일러주는 것 같다. 샴의 전설은 윤성호의 내면 밑바닥에 있는 것이다. 영재를 위협하는 무리 중 하나는 몽골의 천재 쌍둥이 감독들이다. 지금은 분리되었는지 그냥 쌍둥이지만 이들은 과거 때때로 샴쌍둥이로 출현한다. 영재의 영화 속 인물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여자도 샴쌍둥이 중 한명이다. 무엇보다 윤성호의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샴쌍둥이는 정치성과 연애담이라는 이름을 지닌 한몸이다. 물론 이번 영화는 상업적인 요구 탓인지 정치성보다 연애담쪽이 조금 더 분명하고, 누군가 이 샴을 나눠야만 한다고 말했는지 둘 중 하나만 살린다면 무엇을 살려야 할까 고민하다, 정치성 대신 연애담을 살리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이게 좋은 현상인지 혹은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 단언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보다는 윤성호 영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의하게 하는 재주는 비상한데 감동의 진원지까지 데리고 들어가는 데에는 허약하다는 난점을 지적하는 건 필요할 것이다. 윤성호의 진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습을 깨기 위해 들여놓은 양식성이 견뎌내고 돌파해야 할 차원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윤성호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가 늙어서도 응석을 부리며(“연애와 영화의 공통점은 둘 다 응석이라는 점이다”라고 영재는 말한다) 산만할 때 여전히 그의 영화를 좋아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말이 필요 없는 영화(“연애와 영화의 공통점은 둘 다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라고 영재는 또 말한다)를 만드는 경우의 수가 많아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나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 뤽 고다르도 처음에는 유치했다. 지적으로 성장했지만 감동에 있어 허약했다. 그런데 고다르는 젊어서 맹렬하게 유치했기에 늙을수록 깊은 철학을 하며 감동까지 준다. 윤성호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누가 단언할 것인가. 그러니 지금은 산만해도 좋은 것 같고, <은하해방전선>은 확실히 올해의 신명나는 데뷔작이다. 그런 점에서 <은하해방전선>을 표현하기 위해 쓴 표현들을 수정해야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하고 <젊은 베르테르의 산만함>이라고 했지만 마침내 <젊은 베르테르의 활력>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또한 <사랑의 단상>이라 하고 <연애의 단상>이라고 했지만 결국 건강한 <연애의 갱생>이 영화의 최종지다. 그리고 <전체에 대한 통찰>이라 하고 <전체에 대한 산만함>이라 했지만 <전체에 대한 도전>이 윤성호와 그의 첫 장편 <은하해방전선>의 가치다.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만들면 여자들이 좋아하겠지 말입니다.” 영재는 그래서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심일 수도 있다. 만약 윤성호에게 있어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잘 만들어서 연애도 잘되는 세상이라면, 그건 아마 좋은 세상이 이미 왔다는 뜻일 거다. 그러니 다시 말해도 정치성과 연애담은 윤성호의 영화에서 특별히 무슨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이 세계의 전체를 이루는 샴과 같은 관계다. 그러니 연애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한 여자를 연모하여 그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바치는 남자를 향해 “여보시오, 젊은 양반, 내 말 좀 들어봐요! 사랑을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 인간다운 사랑을 해야 돼요. 자기의 시간을 둘로 나눠서 한쪽은 일하는 데 쓰고 다른 한쪽, 즉 쉬는 시간을 여자에게 바치도록 해야지요…. (중략)”라고 어떤 “속물 하나가” 말했다고 전하면서 베르테르는 뒤이어 첨언한다. “만약에 그 젊은이가 그런 충고에 따른다면 그는 쓸 만한 인물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젊은이라면 어떤 영주에게나 직원으로 채용해달라고 추천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애인으로서의 그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그의 예술도 마지막이지!” 베르테르가 영재에게, 괴테가 윤성호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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