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댑테이션>의 찰리 카우프먼은 천재 작가라는 수식어에 걸맞지 않게 시나리오가 써지지 않아 미치기 일보직전이다. 영혼을 쥐어짜며 집필에 몰두하는 찰리와 달리 동생 도널드는 ‘성공을 보장하는 시나리오 쓰기’ 따위의 세미나에 관심을 갖는다. 찰리는 코웃음을 치며 잘라 말한다. “글을 쓰는 법을 어떻게 가르치겠어. 시나리오는 뭔가를 창조하는 예술이야. 교과서대로 따라하는 게 아니라고.”
<시나리오 마스터>를 쓴 데이비드 하워드는, 찰리의 외침을 반만 믿는다. 교과서대로 따라한다고 꼭 좋은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교과서를 따르면 최소한 관객을 지루하게 만드는 오류는 피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시나리오 가이드>(1999, 한겨레출판)로 시나리오 쓰기의 기본기를 알려줬던 데이비드 하워드는 이 책에서 드디어 심화학습에 들어간다. ‘필름 스토리텔링의 건축학’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책답게 벽돌을 쌓고 지붕을 올리듯 시나리오를 축조해나가는 기술을 꼼꼼히 알려준다.
캐릭터는 안전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보다 1부터 100 사이 중 3이나 95 정도에 균형을 맞춘 사람을 선택할 것, 스토리를 전달할 땐 1장에서 관객을 끌어들이고, 2장에서 정교화하며, 3장에선 다시 관객을 놓아줄 것 등. 시나리오를 쓰는 요령에 관한 실용적인 노하우가 빼곡히 담겨 있다.
빌딩의 뼈대 세우는 법을 알려준 뒤부터, 하워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고전적인 시나리오 쓰기를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애니메이션 <러그래츠>와 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2>의 시나리오작가이기도 한 그는, 뭔가 다른 것을 쓰고 싶어하는 작가들의 욕망을 잘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규칙을 깨는 방법에 관한 지침도 제법 꼼꼼히 적어놓았다.
각 장의 예로 <카사블랑카> <쉰들러 리스트> 등 익숙한 영화들을 주로 활용하기 때문에 강의는 관념적이지 않고 명확하게 귀에 박힌다. 지루할 법한 순간마다 뒷골이 서늘한 위트도 간간이 집어넣었다. 어찌보면 이것은 초보들에게 던지는 가벼운 저주에 가깝다.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70쪽 증후군’에 빠져 헤어나오기 어렵다”거나, “눈앞에서 건물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조금 끔찍하다.
시나리오작가들이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에 붙여놓고 싶어할 만한 문구도 아주 많다. “무심한 주인공은 무심한 관객을 부른다”, “대사는 시나리오의 모든 것이다.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문장이 바로 그렇다. 찰리 카우프먼의 작법이 한수 위라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도, 주책없이 책상 앞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싶어졌다. “스토리의 시작은 불현듯 다가오고, 그 전개는 습작과 기술에 달려 있으며, 스토리를 끝맺는 방식은 작가의 내면에서 나온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