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스포트라이트
[서영주] 천천히, 영화를 오래할 그녀

<은하해방전선>의 서영주

윤성호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은하해방전선>에서 “영재에게 은하는 사랑이고 영화”다. 제목마저 ‘은하해방전선’이라니 주인공인 영화감독 영재가 사력을 다해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존재가 은하인 셈이다. 영재의 애인, 나아가 고뇌하는 예술가의 뮤즈 은하를 연기한 이는 서영주다. 그러나 <은하해방전선>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름만 듣고선 그녀의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을 위한 팁 몇개. 서영주는 <친절한 금자씨>에서 기둥서방을 죽이고 수감된 금자의 감방 동료 양희 역을 맡았다. 갓 출소한 금자에게 머물 곳을 보여주던 양희는 쇼킹한 붉은 커트 머리와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사랑한 거 아니죠?” 카메오이긴 했으나 <괴물>에도 등장했다. 한강에 화학약품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하겠다는 미국 정부와 세계보건기구의 발표에 환경단체가 모여 시위를 벌이는 장면. 괴물의 모습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바삐 도망치기는커녕 대뜸 디지털카메라를 꺼내들었던 ‘시위대 엉뚱녀’가 그녀다. 하지만 서영주가 가장 빛났던 순간을 확인하려면, 역시 각종 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일부 단편영화 목록을 뒤적거려야 한다.

첫 영화는 <여고생>이라는 단편이었다. 서영주가 재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학생의 졸업작품이었다. “희정”인지 “화진”인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 인물은 “자는 바람에 체육시간에 밖으로 안 나가고 반 아이들과 함께 있다가 불쑥 ‘나 너네 아빠랑 잤다’고 말하는” 왕따 캐릭터였다. “그걸 자연스럽게 한 거예요. 두번 만에 오케이 받았어요. 그때는 몇 테이크 가고 그런 건 몰랐으니까. 지금은 어떻게 했나 싶어요.” <여고생>에서 함께 작업했던 조상윤 촬영감독이 이경미 감독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 합류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다음 행보를 결정했다. 그리고 미쟝센영화제 비정성시 부문 최우수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그해의 발견이라고 할 만한 이 수작으로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하게 된다.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회사 선배를 연기한 배우분이랑 미쟝센영화제 공동연기상을 받았어요. 그때 상을 준 분이 이영애 언니였고요. <친절한 금자씨> 현장에서 이영애 언니를 40번은 안은 것 같아요. 극중 계속 안는 장면이 있어서…. (웃음)” 친구에게 퇴짜맞은 남자와 엉겁결에 하룻밤을 보내는 동아(단편 <미스 마플과의 하룻밤>), 광기에 휩싸인 한 가족에게 질기게 반항하는 고깃집 종업원(<가족나들이>) 등 엉뚱한 캐릭터들을 거치면서 그녀는 더 많은 이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은하해방전선>은 서영주가 처음으로 주연급으로 캐스팅된 장편영화다. “감독님은 그냥 편안하게 하라고 하셨어요. 저로선 의도하신 대로 정확하게 연기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요. 그래서 보기 전까지 어떻게 나왔을까 궁금했어요.” 서투른 연애와 소통의 어려움. 어쩌면 상징적인 의미가 강할 은하는 서영주의 연기를 입고 귀엽고 천연덕스러우며 현실적인 여자로 되살아났다. 정갈한 목소리와 주근깨 돋은 뺨, 혼란스러운 손놀림과 은근한 표정 같은 은하의 미덕이 고스란히 엿보일 만큼 서영주는 그녀와 닮아 있다. “은하가 어떤 사람이냐고 계속 질문했어요. 은하의 모델이 있다고 하시니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거든요. 영재 역의 임지규씨가 윤성호 감독님이라는 모델을 보고 배우듯이요. 근데 감독님은 정보를 주지 않으시더라고요. 내가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린 시절 참여한 두번의 연극에서 연기의 매력을 경험한 서영주는 한예종 연극원에 입학했다. 이미 다른 대학의 조각과를 졸업한 뒤였다. “배꼽 밑에 누구나 하고 싶은 걸 가지고 있는데 제겐 그게 연극이었어요. 졸업하고 뭐하지? 연기? 극단? 그전까지 한예종이랑 서울예대만 알고 있었거든요. 편하게 한예종 시험을 봤어요. 운 좋으면 붙고 안 좋으면 떨어지겠지. 붙고 나서 선생님들이 너 이상해서 뽑혔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천천히 영화로울 구슬.’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전 서영주가 건넨 명함에는 이름 석자 대신 그 뜻풀이가 담겨 있었다. 연기는 물론이고 인생 전반에 대한 그녀의 소망을 함축한 문장이기도 했다. “저는 차분하지 못한 제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아요. 배우로서의 불안함은 아직 없지만 곧 시작될 것 같고요. (웃음) 근래 동양화 수업을 듣고 있는데 거기서 차분하게, 천천히 그림을 그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연기 수업 중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거든요. 조급해하지 말고 준비가 되면 천천히 하십시오.” 그러니 사람들이 지금 당장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다 해도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다. 서영주는 오히려 매번 꺼내보는 데도 결코 끝내지 못할 장편소설처럼 오랫동안 아껴 보고 싶은 배우에 가까우므로.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