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불과 보름여 앞뒀지만 영화계는 미동조차 없다. 예상 못한 건 아니나 지나치게 ‘훠∼엉’하고 ‘쌔∼앵“하다. 관련 공약들이 쏟아져 나왔던 1997년, 적극적으로 후보 지지에 나섰던 2002년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대선을 앞둔 영화계의 반응을 취재한다고 했더니 한 제작자, 이런다. “그렇게 재미없는 이야길 써서 뭣하려고 그래?” 그러고보니 <씨네21>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통령 선거 때마다 진행했던 후보자 인터뷰를 이번엔 하지 않았다. 이젠 문화대통령, 영화대통령이 필요없는 걸까. 아님 문화대통령, 영화대통령감이 없는 걸까.
11월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대선후보 초청 문화산업포럼 정책간담회’가 열렸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가 참석한 이날 간담회는 따져보면 이번 대선의 주요 후보들이 ‘처음으로’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참고로 두 후보 모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깜짝 등장했지만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비난을 들었고, 이명박 후보는 10월19일 ‘이제는 문화입니다’라는 주제로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문화예술인들과 대화의 자리를 갖긴 했으나, 비전과 정책을 심도 깊게 주고받지는 않았다. 이강복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는 “두달 이상 준비한 자리라 이후에 등장한 대선 후보들까지 고려하진 못했다”면서 “후보들로부터 구체적인 답변을 듣지는 못했으나 문화쪽 예산 증액, 저작권 보호 방안 강구 등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흥미로운 건 앞선 두 차례의 대선에서 후보들과 ‘독대했던’ 영화계가 이번에는 연극, 음악, 드라마 등 다른 분야 종사자들과 함께 정책간담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과 함께 문화산업포럼 정책간담회에 나선 이현승 감독은 “저작권 보호에 있어 문화산업계가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포럼쪽 제안을 받아들였다”면서 “따로 간담회를 열 만큼 영화계만의 이슈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강복 문화산업포럼 대표도 “영화인회의나 한국영화제작가협회쪽에 간담회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는데 쉽게 받아들여졌다”면서 “과거 같으면 스크린쿼터 문제가 있었겠지만 축소된 상황이라 별도의 자리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제작자는 “영화쪽이야 불법복제와 투자를 좀더 해달라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며 “대선 후보들 입장에서도 의례적인 만남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화계 이슈 실종… 산업적 성숙, 정치권에 대한 기대 저하도 원인
“후보 여러분! 문화에 투자하십시오.” 2002년 대선 당시 문화부문 100대 주요 과제들을 발표했던 단체들 또한 이번엔 잠잠하다. 당시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등과 함께 정책안 마련에 참여했던 한국독립영화협회의 원승환 배급지원센터장은 “각 후보들의 문화 관련 공약을 보면 특별한 게 보이지 않는다”면서 “2002년처럼 각 문화단체끼리 연대해서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번에는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인회의 김도학 연구원은 “대선 분위기 자체가 정책을 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지 않나”라면서 “모두들 경제 이야기만 하는데다 기조만 놓고 보면 심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후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후보가 대선 국면에서 정치적으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보니 더욱 거리를 두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분위기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새정치국민회의, 열린우리당 등에 몸담으며 영화계와 교류했던 인사는 “가장 공약다운 공약이 만들어졌던 건 DJ 때였다”고 말한다. “대선을 앞두고 뚝딱 공약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영화계와 함께 몇달에 걸쳐 협의한 결과물로 공약을 내놓았고” 실제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DJ의 모토는 표현의 자유 보장, 영화진흥기구 재편, 투자조합 마련 등으로 이어졌다. DJ가 추진한 정책이 지난 10년 동안 한국 영화산업에 긍정적으로 기능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많지 않다. 노무현 정부의 영화 공약 및 정책 또한 DJ가 그린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공공성 확대, 문화다양성 증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이 더해진 정도다. 이 관계자는 “대선을 앞둔 영화계의 차가운 시선에는 노무현 정부가 약속했던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면서 입었던 영화계의 정서적 타격이 정치권 전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얼마 지원한다’ 약속보다 ‘어떻게’ 지원할지 보여줘야
이슈가 없다기보다 이슈를 놓고 영화계 내부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황”도 영화계가 침묵하는 이유 중 하나다. 한 제작자는 “영화인들 대부분이 원했던 스크린쿼터 유지나 검열 철폐 등과 같은 사안들이 없다”고 말한다. 반면 한국 영화산업 내에 다양한 층위가 생겼났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김혜준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은 “통제만이 존재했던 시기를 지나 지난 10년 동안 진흥을 택했던 정책 덕분에 한국 영화산업이 일정한 체계를 갖췄다”면서 “지금은 정부에 기대기보다 산업 주체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이런 것 해달라, 저런 것 해달라”라고 정부에 요구하는 것이 없진 않겠지만, 그 내용이 5년이나 10년 전처럼 큰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선을 앞둔 영화계의 이런 얼음 분위기를 각 당 대선 후보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석해보면 어떨까. 한 정책 관계자의 말이다. “각 후보들이 문화 관련 예산을 높이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기준에 따라 예산 비율은 달라지는 거니까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예산의 문제가 아니다. 중장기 계획도 누구나 세울 수 있다. 다만 그걸 누구에게 맡겨서, 어떻게 집행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동안 문화관광부 장관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나. 좋은 사람을 발탁했으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정책을 끌고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또한 실현 가능성 여부가 매번 논란이 되는데 적어도 문화부 총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매번 경제 관련 부처들에 끌려가는 문화관광부의 위상으로는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무얼 하겠다는 약속보다 약속을 어떻게 지키는지 두고 보겠다는 뜻일 것이다. 영화계의 여론은 대선까지 남은 10여일보다 그 뒤 5년을 눈뜨고 지켜보겠다는 의지로 쏠리고 있다.
각 대선 후보의 문화 관련 정책 현황
공개된 공약 자체가 많지 않아… 일부 후보 외엔 선언적 약속만
영화분야만을 놓고 각당 후보들의 공약 상호 비교는 불가능하다. 관련 보도 또한 11월5일 <세계일보>에 서규환 인하대 교수가 쓴 기사가 전부다. 이번 대선에선 여론조사 결과 공표가 후보자 선거 6일 이전까지 가능해짐에 따라 언론들 또한 지지율 변동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이다. 공개된 공약 자체가 많지 않다. 발언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현재 정부 전체 예산의 1%인 문화 예산을 조금 더 올려야 한다”며 “대한민국의 예산에서 낭비되는 것을 뜯어보면 1년에 20조원이 넘는다. 이를 문화예술과 복지에 쓰겠다”고 밝혔다. 문화산업포럼 정책간담회에서도 “문화콘텐츠산업이 5% 이상 성장”하고 “세계 5위 안에 들어야”“한국의 미래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나라당의 노무현 정부 문화정책 평가에서는 정치적 편향이 지나친 코드인사와 갈팡질팡하는 스크린쿼터 정책을 문제시했다. 한편 앞의 정책간담회에서 “문화도 (세계시장에) 팔아야 한다”며 비즈니스맨이 되겠다고 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20대 핵심정책공약’을 통해 문화분야의 양극화 현상을 극복해야 ‘문화강국’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화관광 분야 예산을 2012년까지 “1.5%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이를 지역간, 계층간 문화소비 격차와 불균형을 줄이는 데 투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저소득층이나 창작자들을 위한 복합문화예술센터 및 단지 조성 등이 대표적인 공약이다. 12명의 후보들 중 영화를 포함한 문화 관련 공약을 충실히 내놓은 후보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다. 스크린쿼터 원상회복, 시도별 시네마테크 운영 및 설치,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방지법 제정 등 문화다양성 확보라는 틀 안에서 여러 공약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