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 책 광고에서 인상적인 문구. “거짓말이 신뢰를 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진실은 복잡하지만 거짓은 단순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찍을 사람 없다고 하는 게 편한 이유는 간단하다. 찍는 것은 복잡하지만 안 찍으면 단순하기 때문이다.
역대 대선에서 늘 죽도록 고민했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 과거 내가 안 찍었던 분의 이름이라도 주관식으로 쓰고 나와야 하나 싶다. 몇년 전 지방선거에서는 밤새 고민하고 기표소에 들어가서도 고민하다가 찍긴 찍고 나왔는데 누굴 찍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하도 괴로워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선거 때 과도하게 고민하는 것은 내가 하는 몇 가지 고질적인 ‘오바질’ 중 하나인데, 이번에는 진짜 토할 거 같다.
‘오바’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다. 내 주변의 누구는 영 맥을 못 추는 대통합민주신당을 보며 공약으로 ‘디제이 수렴청정’을 내걸라는 제안을 하겠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구는 감동도 재미도 없는 이번 선거에서 유일하게 ‘재미’를 선사하는 허경영 총재님을 찍겠다고 했다. 수구꼴통인 고려대 출신 어느 아저씨는 본인의 대북관조차 젖혀두고 이번 대선은 서울대와 고려대의 싸움이라고 열변을 토하고, 늘 기도하시는 어느 할머니는 그래도 장로님이 나라를 이끌어야 하느님의 나라가 된다고 믿으신다. 저마다 처지와 조건에 따라 이렇듯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여론조사에는 이런 ‘열기’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한겨레>에 글을 쓴 어느 교수님 얘기가 공감이 갔다. 찍을 사람을 못 정했다는 응답이 절반인 여론조사라면 가령 40% 지지율이 나온 후보의 지지율은 20%로 봐야 하는 게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이동전화 가입자(4300만명)가 유선전화 가입자(2310만명)를 훨씬 넘는 세상에서 한낮에 집에서 전화받는 사람을 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다분히 편향된 표본일 수도 있겠다.
검찰이 12월4∼5일께 BBK 사건의 김경준씨를 어떻게 할지 발표한단다. 어찌되든 그분은 막판에 더 괴롭겠다. 어찌나 괴로우신지 공식 선거운동인 방송토론을 모두 거부하신다. 이 상처로 나중에 대통령이 돼도 불편하고 곤란한 일을 다 거부하실까 걱정된다. 그를 찍겠다는 이들조차 그에게 감정이입은 안 하는 것 같다. 정치인을 위해 눈물 흘리는 일은 지난 대선으로 끝났다. 스타는 대중의 사랑을 먹고산다는데, 정치인은? 표를 먹고살지. 정치인의 수준은 유권자의 수준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맞다. 그러니, 끝까지 골라 가려, 그래도 투표할 수밖에. 으이구, 내 팔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