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을 샀다가 영업에 실패해 빚을 떠안았다. 당장 7만5천달러를 갚지 못하면 봉변을 당한다. 이혼 뒤 외롭다. 어린 아들과는 이따금씩 학교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만 토막 대화를 한다. 17년간 재직했는데도 대형 로펌의 임원이 되지 못했다. 그저 다른 변호사들이 맡기 싫어하는 지저분한 사건만 처리할 뿐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회사의 절친한 동료 변호사가 죽는다. 죽음 주변을 떠돌던 그는 동료가 뭔가를 폭로하려다 변을 당했음을 직감한다. 스스로의 하루하루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데,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할까. 겉으로 보기엔 화려한 대형 로펌의 변호사. 그러나 곤궁과 권태에 찌든 마이클 클레이튼의 삶은 이제 총체적 난국에 부딪혔다.
<마이클 클레이튼>은 변호사가 주인공인 스릴러의 전형적 스토리 라인을 가졌다. 우연한 계기로 거대 집단의 음모와 악행을 알게 된 개인이 정의를 위해 외로이 맞서는 이야기. 그러나 이 영화를 전형적인 법정스릴러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마이클 클레이튼’에서 장르적 쾌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실존적 딜레마다.
삶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을 때, 마이클 클레이튼의 외투 호주머니에는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빨간색 표지의 결정적인 자료가 꽂혀 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이 자료를 뽑아서 용감하게 펼쳐들 것인가, 아니면 이제까지 그래왔듯 자조적인 삶을 계속 조용히 이끌고 나갈 것인가. 공교롭게도 <매트릭스>에서도 진실을 선택하는 약은 빨간색이었다.
이 영화는 스스로를 ‘청소부’나 ‘수금원’으로 지칭하면서 자기 모멸적인 나날을 살아가던 남자가 고쳐 살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그때 원칙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삶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사다리가 된다. 이 영화를 연출한 사람은 제이슨 본 시리즈의 각본을 썼던 토니 길로이. 프랜시스 코폴라나 시드니 루멧 혹은 앨런 J. 파큘라가 그들 경력의 정점에서 만들었던 스릴러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감독 데뷔작에서 토니 길로이는 고전적 화법이 지닌 매력을 안정적으로 펼쳐 보인다. 제이슨 본 시리즈의 과시적인 스타일보다는 드라마투르기와 캐릭터 조형술의 황금시대였던 70년대식 화술을 따르는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면들은 거의 대부분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말을 섞을 때 나온다.
조지 클루니와 틸다 스윈튼이 만나는 두번의 대화장면은 두명의 배우가 말로 주고받을 수 있는 긴장감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잠적한 동료 아서(톰 윌킨슨)를 찾아나선 마이클이 종이봉투에 잔뜩 바게트를 담은 그를 발견한 뒤 말을 주고받는 장면 역시 농축된 감정적 밀도가 대단하다. 조지 클루니는 배우와 감독으로서, 그리고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서, 점점 더 할리우드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도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클루니는 최소한 로버트 레드퍼드처럼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은 역시 라스트신이다. 모든 상황을 경쾌하게 매듭지은 마이클이 카메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올 때 뒤처리를 위해 경찰들이 그를 지나쳐 반대방향으로 몰려가는 40초가량의 롱테이크 장면은 짜릿하기 이를 데 없다. 이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삶의 수렁에서 빠져나가는 마이클의 모습을 부감의 롱숏으로 격려하듯 지켜보던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택시 뒷좌석에 올라탄 그를 비춘다. 운전사가 묻는다. “어디 가세요?” 그가 답한다. “50달러 드릴 테니 그만큼 그냥 돕시다.” 그리곤 엔딩 타이틀이 흐르는 내내 카메라는 삶의 새로운 계기를 만난 자의 얼굴을 오래오래 들여다본다. 50달러어치의 드라이브가 끝나면 마이클 클레이튼은 어디서 내릴까.
올 최고의 라스트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타인의 삶>과 <마이클 클레이튼> 사이에서 잠시 망설일 것 같다. 그래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수렁에서 이제 막 헤엄쳐나온, 만감을 무표정 속에 감춘 한 사나이의 진실한 얼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