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고 쾌활한 여자 앤(클레어 데인즈)은 친구 라일라(메이미 검머)의 결혼식에 들러리를 서려고 온다. 라일라는 9년간 다른 남자를 사랑해왔고, 그 남자 해리스(패트릭 윌슨)는 앤과 사랑에 빠진다. 라일라의 남동생 버디(휴 댄시)는 대학 시절부터 앤을 사랑해왔다. 네 남녀는 각자 자신의 지금 사랑이 운명이라 믿지만, 그것은 바람과 모래처럼 손에서 빠져나간다. 생애 단 한번뿐이었을 사랑과 그것을 놓친 한탄. <이브닝>은 느리고 관념적인 대사들과 죽음을 앞둔 여주인공의 환상의 반복으로 세월이 주는 질문들을 전달하려 한다. <세월> <세상 끝의 사랑>의 소설가 마이클 커닝엄이 각색을 맡아 시간과 시점을 파격적으로 해부해 인물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실타래 풀듯 풀어내지만, 그 능력만으로 애초 뼈대밖에 없는 스토리의 빈약함과 주제의 피상성을 넘긴 어렵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글렌 클로즈, 메릴 스트립 등 쟁쟁한 여배우들의 육체에 이미 새겨진 세월이 <이브닝>이 아우르려는 세월과 지혜보다 때론 더 깊어 보인다. BBC의 TV영화 <엘리자베스 1세>에서 옴므파탈의 매력을 뿜어낸 휴 댄시가 알코올에 중독된 연약한 로맨티스트로 출연하는데 그 분량이 길지 않아 여성팬들에겐 아쉽다. 촬영감독 출신인 라요스 콜타이는 영국 뉴포트의 우아한 전원을 스크린에 담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