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1998)는 왕좌에 갓 올라 권력의 암투와 사랑의 변덕에 휘둘리던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으로서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었다. <엘리자베스>의 후속편으로, 다시 한번 세카르 카푸르 감독과 케이트 블란쳇이 함께한 <골든 에이지>는 그로부터 3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스페인과 영국의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에 초점을 맞춘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메리 스튜어트(사만다 모튼)를 이용해 엘리자베스(케이트 블란쳇)를 제거하려고 한다. 엘리자베스를 보좌해온 월싱엄(제프리 러시)은 스페인의 위협에서 영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권력자와 정략 결혼할 것을 촉구하지만, 여왕의 마음은 감자와 담배를 들고 나타난 탐험가 월터 라일리(클라이브 오언)에게 끌린다. 여자로서 사랑받는 삶과 여왕의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와중, 메리의 암살 음모가 발각되고 그녀의 처형은 스페인에 침공의 빌미를 제공한다. 병력의 완벽한 열세로 모두가 참담한 패배를 점치는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맞선 전쟁을 시작한다.
<골든 에이지>는 엘리자베스를 폐위시켜 메리를 여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던 배빙턴 음모사건,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에 대패한 칼레해전 등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에 놓고 있지만, 실상 재현보다는 극화에 힘을 썼다. 30년의 시차를 전혀 실감하지 못할 만큼 팽팽한 외모로 등장해 로맨스의 중심에 놓이는 엘리자베스는 당시 나이가 50살을 넘긴 상태였고, 해전의 주역으로 묘사되는 월터 라일리는 실제로는 단 한번도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다. 고증의 진실성 여부를 논외로 치더라도, <골든 에이지>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적 사실을 대체하는 것이 할리우드 스타일의 클리셰라는 것이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의 절절한 키스, 밧줄을 타고 바다를 가르는 활약 등 영화는 숱하게 소비되어왔던 로맨스와 액션의 감수성을 재탕한다. <엘리자베스>에서 우아하게 절제된 연출력을 보여주었던 인도 감독 세카르 카푸르는 관습적인 스펙터클의 함정에 빠졌다. 눈을 얼얼하게 만들 정도의 호화로운 의상과 현란한 세트, 시종일관 귀를 찌르는 장엄한 오케스트라는 숨돌릴 틈 없는 과잉으로 드라마를 밀어내는 역효과를 낸다. <골든 에이지>는 여자, 여왕, 전사로서의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모두 담으려는 욕심을 품었지만, 빈곤한 캐릭터와 드라마가 탄생시킨 것은 역사의 중심에 실존했던 한 인간보다는 눈부신 의상을 입혀놓은 인형에 더욱 가까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