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로 간주될 정보가 있습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죽음의 테마에 사로잡힌 지도 꽤 오래됐다. 캘리포니아 데스 밸리(Death Valley)에서 <게리>를 찍은 2002년을 기점으로 치자면 5년째다. <엘리펀트>(2003)는 의도적으로 또래들을 살해한 10대 소년에 관한 영화였고, <라스트 데이즈>(2006)는 불가피하게 자기를 살해한 20대 청년에 관한 영화였다. 그리고 <파라노이드 파크>는 의도하지 않은 살인을 범하고 그 기억을 혼자 삼켜버리는 10대 소년에 관한 영화다. ‘죽음과 청년’ 연작(?) 네편은 미학적으로도 소집단을 형성한다. 이들 영화에서 관습적 드라마투르기와 편집 공식은 거의 폐기되고, 시간은 주관적으로 흐른다. 또 음악과 음향이 그리는 보이지 않는 풍경(sound-scape)이 이미지를 질기게 따라붙는다.
포틀랜드에 사는 소년 알렉스(게이브 네빈스)는 친구 제라드(제이크 밀러)에게 이끌려, 집나온 10대 스케이트보더들이 직접 만든 공원 ‘파라노이드 파크’를 찾는다.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보드를 타고 날아오르는 광경은, 이혼을 앞둔 부모와 스트레스를 받으면 음식을 토하는 어린 동생, 처녀 딱지 떼려고 안달난 여자친구에 대한 일상적 고민으로부터 알렉스를 해방시킨다. 혼자 밤을 보내게 된 어느 날 알렉스는 파라노이드 파크로 간다. 공원 아이들의 기차 올라타기 놀이에 어울린 알렉스는 철도 경비원을 떨쳐내려 무심결에 팔을 내저었다가 죽음을 초래한다.
겁먹은 소년은 침묵과 회피를 택한다. 그러나 ‘비밀’은 알렉스의 삶을 영영 바꾸어버린다. ‘진짜 문제들’의 세계로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내디뎠음을 깨달은 소년은 이제 다른 세상에 속한 여자친구에게 결별을 고한다. 그리고 친구 메이시(테일러 몸젠)의 조언에 따라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생긴 일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영화는 얼버무리고 멈칫대는 대로 알렉스의 기록을 따라간다. 소년은 결정적 대목에 이르면 웅덩이를 건너뛰듯 고개를 돌려버리기도 한다. 어린 죄인의 윤리적 책무를 따지는 일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웅크렸던 알 속에서 갑자기 끌려나온 소년의 세계가 급격히 변모하고 동요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소년을 감싼 이미지와 사운드, 파편화된 시간의 비늘은, 감정과 감정이입, 사건의 통찰을 튕겨낸다. 니노 로타부터 베토벤,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까지 종횡무진하는 음악은 쉴새없이 영화의 중심을 해체해 “그래서 어찌되는 거야?”라는 관객의 의문까지 부드럽게 무력화시킨다. 사고 직후 알렉스가 샤워기 아래에 하염없이 서 있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라스트 데이즈>의 폭포장편처럼 <파라노이드 파크> 전체를 함축한다. 카메라의 끈질긴 응시 속에 소년의 고개 숙인 단발머리와 그것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은 하나의 도상이 된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여러모로 10대의 살인을 다룬 <엘리펀트>와 짝을 이룬다. <엘리펀트>에서 구스 반 산트는, 사태를 논리화하기를 철저하고 치밀하게 거절함으로써 컬럼바인 사태로부터 의미를 박탈해버렸다. 그러나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반 산트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네게 일어난 일을 문장으로 써보라”고 알렉스에게 권한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파라노이드 파크>는 외부자의 영화다. ‘왕따’란 뜻이 아니다. 10대들은 어른들이 이룩한 세상의 외부자다. 남의 세계에 엉거주춤 끼어 있다는 기분, 그것이 10대 시절 삶의 감각이다. 10대들이 스스로 건설한 공간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세상에 던져진 아이들은 자기 의지대로 제 몸을 공중에 던진다. “이 세계에는 내 사소한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 있지 않을까?” 자문하던 소년은 파라노이드 파크에서 해방감을 느끼자마자 손에 피를 묻히고 폭력적으로 성인의 세계에 편입된다. 죽음을 염두에 두게 된 소년은 좀더 냉담해진다. 그와 여자친구의 첫 섹스는 영화사상 가장 무감동한 동정 상실의 순간일 것이다.
“나는 아직 거기 갈 준비가 안 됐어.” “파라노이드 파크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렉스와 제라드의 이 대사는 영화 속에서 두 차례 반복된다. 그때 소년들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