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씨를 사적으로 만나, 나와 관련한 쾌락의 요청을 충족시켜주기로 한다.” 허버트 백작부인은 이런 조건으로 네빌과 계약을 맺는다. 약속대로 백작의 영지를 열두장의 그림에 담던 중, 네빌은 자신이 이미 그린 곳에 자꾸 그림을 그릴 때에는 없었던 물건들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원치 않는 변화에 불평을 하면서, 충실한 자연주의자답게 그는 새로 나타난 그 물건들을 제 그림 안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탈만 부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 같다며, 네빌의 그림들 속에 살인의 단서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물건들은 네빌의 살인을 말해주는 증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원의 살인사건에 애거서 크리스티와 같은 과학적 추리를 들이대는 것은 쓸데없는 일. 그림에 담긴 그 단서라는 것들의 기호적 성격은 그 인접성으로 사건을 증언하는 ‘지표’가 아니다. 그저 막연한 암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기호 아닌 기호다.
영화 전체를 통해 분명한 사실은 사내가 두 여인이 놓은 덧에 걸려들었다는 것. 두 여인이 허버트 백작의 살해에 관련된 것은 비교적 명확하다. 하지만 살해의 동기가 불분명하다. 두 여인이 네빌과 성교를 대가로 한 계약을 맺은 것이 영지를 상속할 후계자를 얻기 위한 계략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굳이 백작을 살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살해의 책임을 네빌에게 뒤집어씌워 그마저 죽게 할 이유도 뚜렷하지 않다.
영지의 풍경화
“제 남편의 영지를 그려주었으면 해요. 남편은 자부심이 강해요. 자기 영지에 대해 칭찬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지요.”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정물’이라는 장르는 부르주아들이 제 소유물을 그림으로 다시 반복해 가지려는 욕망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백작부인 역시 풍경화의 존재 이유를 소유에 대한 욕망으로 설명한다. 정물화가 동산(動産)에 대한 시민계급의 소박한 애착을 반영한다면, 영지의 풍경화는 거대한 부동산에 대한 귀족계급의 과시욕과 연결된다.
그리너웨이는 네빌의 풍경화를 왕정복고기의 ‘영지 풍경화가들’(estate portraitists) 스타일로 구상했다. 영화 속에 등장할 그림은 “정교하고, 개성이 거의 없는 세밀한 소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귀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성적 표현의 유무가 아니었다. 그들은 화가들이 제 영지의 모습을 멋대로 왜곡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영지. 그들에게 그림의 스타일은 몰개성적일수록 좋았다.
네빌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 격자 모양의 도구를 사용한다. 이 도구의 조상은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알베르티 그리드’. 이를 사용하면 대상의 윤곽을 거의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모사할 수 있다. 네빌의 그리드는 화면을 열여섯개의 직사각형으로 나눈다. 알베르티는 시점의 고정에 구멍 뚫린 막대를 사용했지만, 네빌의 것에는 그 자리에 또 다른 그리드가 달려 있다. 전방의 큰 그리드와 후방의 작은 그리드의 중앙십자를 서로 겹치면 시점이 고정된다.
메타 영화
여기서 그림과 사진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그림은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다. 화가는 시야를 가리는 물건을 상상을 통해 화폭에서 제거하고, 허전한 구석에는 상상으로 뭔가를 채워넣는다. 하지만 네빌은 일체의 상상을 거부한 채 가시적인 것의 모사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반드시 피사체를 요구하는, 그리하여 그것의 존재를 증언하는 사진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그의 운명을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이는 네빌의 개인적 스타일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정신을 ‘자연의 거울’로 규정했던 고전주의 인식론의 초상이다. 마치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나니스>(시녀들)가 고전주의적 표상의 표상인 것처럼 네빌의 영지 풍경은 합리주의적 표상의 표상이다. 그것들은 감독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영화의 원제(The Draughtman’s Contract)에 들어 있는 ‘공인’(工人)이라는 말은 동시에 기술로 영상을 만들어내는 감독을 암시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 즉 일종의 메타 영화가 된다.
바로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시대였다. 천문학과 점성술, 화학과 연금술, 합리성과 판타지는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 모순이 영화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모사의 기계적 정확성으로 상징되는 네빌의 철저한 합리주의가 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은 온통 해석적 모호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반대의 극은 늪에서 나와 온몸에 이끼를 뒤집어쓴 푸른 사내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이 ‘광우’가 마치 전지적 작가처럼 그림을 그리는 합리적 주체의 움직임을 모두 꿰뚫어본다.
바로크의 폭군
평론가들이 이 영화와 베냐민의 <독일비극의 근원>(1928)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베냐민은 바로크 시대의 독일 비극(Trauerspiel)과 고대 그리스의 비극(Tragodie)을 비교한다. 그리너웨이 역시 영화 자체를 바로크 비극의 형식으로 구성하고, 꼬마 네빌에게 어머니가 독일어로 그리스의 비극적 모티브를 들려주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앞으로 그에게 벌어질 비극을 미리 예고한다. “옛날 그리스에 페르세포네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바로크 비극의 군주는 전능하면서도 동시에 무능하다. 그는 궁정에서 모든 권력을 행사하나, 결국 가신들의 음모에 희생된다. 네빌 역시 폭군이자 순교자다. 그 역시 (부인을 요구할 권리를 포함하여) 백작의 모든 권력을 위임받아 휘두르나, 결국은 모두가 가담한 공모의 가련한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는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한다고 믿으나, 정작 제 운명만은 알지 못한다. 그것을 꿰뚫어보는 것은 푸른 사내. 그가 아폴론적 합리성 너머에서 디오니소스적 진리를 계시하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 노릇을 한다.
베냐민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는 ‘신화적 극복’의 모티브가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적 질서의 수립 혹은 우주적 질서의 회복으로 끝난다. 바로크 비극은 다르다. 거기에는 그저 보편적 몰락의 자연사와 그에 따른 멜랑콜리만 있을 뿐이다. “바로크 비극의 인물들이 죽는다면, 그것은 그냥 그렇게 시체로서만 알레고리의 고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네빌은 푸른 사내가 튀어나온 그 늪에 시체가 되어 떠오른다. “그들은 불멸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체를 위해서 파멸한다.”
불투명한 알레고리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 영지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놓거나.” 마스크를 쓴 사내들이 쓰러진 네빌의 옷을 벗기며 말한다. 이 대사는 아마도 영화 전체의 구성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게다. 이 영화에서 투명한 기호의 분명한 증거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사태의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들은 네빌의 옷처럼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 영화 전체에 흩어진다. 앞에 말한 논문에서 베냐민은 고전주의적 합리성에 “알레고리적 문자그림이 보여주는 이 무정형의 파편”을 대비시킨 바 있다.
합리성이 폭력을 휘두르던 고전주의 시대가 예술사에서는 공교롭게도 합리성에 반기를 든 바로크 시대와 일치한다. 이 모순적 상황이 이 영화를 시대의 알레고리로 만들어준다. 네빌의 죽음은 고전주의적 주체의 몰락을 암시한다. 시체 위에 내려앉은 구원없는 몰락의 멜랑콜리. 두개골의 바니타스로 상징되던 이 바로크의 세계감정이 이 영화를 통해 주체의 죽음, 이성의 죽음, 역사의 죽음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장례행렬로 거듭난다.
네빌은 프레임을 위해 그리드를 사용하고, 영화 역시 대표적인 “프레이밍의 장치”다. 그리하여 ‘공인(draughtsman)의 계약’은 결국 ‘감독(director)의 계약’이라 불려야 한다.” 언젠가 그리너웨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새로 해야 할 것은 프레임의 파괴다. 20세기의 회화는 모든 프레임을 파괴했는데, 영화만은 예술의 제적에서 아직도 600년 전에 만들어진 르네상스적 관념을 따르고 있다.”
장례행렬은 이제 영화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부산을 방문한 그는 “전통적 영화는 이미 뇌사상태에 빠졌다”며, “텍스트와 프레임, 배우와 카메라 등 영화의 ‘4대 폭군’으로부터 해방돼야 영화가 재탄생된다”고 말했다. 영화는 네빌을 종종 프레임에 갇힌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는 네빌을 죽였고, 목하 이 폭군의 옷을 벗겨 여기저기에 뿌리고 다니는 중이다.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