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맞는 1900년 1월1일,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여객선의 피아노 위에서 갓난아기가 발견된다. 화부(火夫)의 손에 맡겨진 아이는 ‘1900’이라 불리며 배의 기관실에서 파도를 요람으로, 소음을 자장가로 알고 자란다. 아이가 처음으로 음악을 접하는 것은 사고로 숨진 아버지의 장례식 날. 갑판 위의 아이가 위쪽 일등석에서 들려오는 음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옆에 선 일본 여자가 말한다. “옹가쿠(音樂), 뮤직.”
대양의 피아니스트
아이는 어느 날 기관실을 벗어나 출입이 금지된 일등석으로 들어간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남녀의 모습은 볼룸의 반투명 유리를 통해 난반사되어 키르히너의 표현주의 회화처럼 보인다. 어느 늦은 밤 아이는 볼룸으로 들어가 그랜드피아노 위에 앉는다. 잠에서 깬 승객들은 하나둘씩 잠옷 차림으로 볼룸으로 나와 여덟살 꼬마의 연주에 넋을 잃고, 이로써 대양의 피아니스트 ‘1900의 전설’이 시작된다.
선상 악단의 피아니스트가 된 1900은 파도가 심하게 치던 어느 날 트럼펫 주자 맥스를 만난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맥스를 피아노 의자 위에 앉힌 채 그는 고정 장치를 풀어놓은 피아노를 타고 마치 놀이동산의 회전하는 커피 잔처럼 여기저기 흘러다니면서 연주를 한다. 이 음악적 롤러코스터는 피아노가 볼룸의 유리창을 깨고 선장실 문에 처박힐 때까지 계속된다.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3등 선실의 연주. 업라이트 피아노 앞의 1900에게 어느 이탈리아 이민자가 외친다. “헤이, 친구. 타란텔라 좀 연주해 봐!” “그게 뭔지 알면 진작에 했지.” 남자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두들겨 타란텔라의 리듬을 준다. “땃다 닷따닷따 땃다닷다 땃다 닷따다….” 1900은 잠시 건반을 더듬더니 곧바로 즉흥연주를 시작하고, 3등 선실은 열광적 춤판으로 돌변한다.
감각 간 번역
“어디서 얻지?” “뭘?” “음악적 영감 말야.” 맥스가 묻는다. “저기 저 여자 보이지?” 순간 경쾌하던 연주가 비장한 선율로 바뀐다. “틀림없이 젊은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였을 거야. 현재 보석을 훔쳐 도피 중이고. 마치 이 음악 같지 않나?” “저기 저 남자도 해볼까?” 연주가 우울한 선율로 바뀐다. “이게 그의 음악이야. 과거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지.” 연주는 다시 정열적 리듬으로 바뀐다. “저 여자를 봐. 아마도 전직이 창녀였을 거야.”
영감의 근원은 천상이 아닌 선상에 있다. 1900은 승객들을 보고 거기서 느껴지는 정서를 사운드로 옮긴다. 그 풍부한 음악적 영감의 비결은 이렇게 이미지를 음향화(sonify)하는 감각 간 번역(intersensory translation)에 있다. 음에서 색감을 느꼈던 스크랴빈, 색에서 음감을 느꼈던 칸딘스키처럼, 이 음악의 천재는 배에서 만난 이들의 시각적 인상을 사운드로 변성하는 공감각의 연금술을 실행한다.
영화 속에 나타난 음악의 관념은 낭만주의적이다. 1900은 배우지 않고도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고, 연주 역시 작곡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즉흥(improvisation)이다. 비주얼을 ‘정서’를 거쳐 사운드로 번역하는 것 역시 음악을 감정의 표현으로 보는 낭만주의적 관념이며, 또 연주자의 능력을 초인적 경지로까지 과장하는 것 역시 낭만주의의 상투적 수사다.
음악의 결투
“피아노 앞에는 아무나 앉는 게 아니야.” 선상 피아니스트의 소문을 들은 재즈의 창시자 젤리 롤 모튼. 1900에게서 자리를 빼앗더니 현란한 연주를 시작한다. 결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3라운드의 마지막 연주. 얼굴이 흠뻑 젖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던 담배를 집어 스트링에 갖다대자 불이 붙는다.
영화 속의 연주는 실제로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어떻게 저런 연주가 가능했을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영화는 가끔 1900의 초인적 능력을 보여주려고 그의 두손을 오버랩하여 네개로 보여준다. 잘 뜯어보면 실제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연주를 하나로 합쳐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두 번째 라운드. 여기서 1900은 젤리 롤 모튼이 앞서 연주했던 곡을 그대로 반복해 연주한다. 청중은 1900에게 야유를 보내나, 젤리의 표정은 굳어진다. 상대가 자기가 만든 곡을 딱 한번 듣고 그대로 재연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 한번 들은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하는 초인적 능력은 자폐증을 가진 서번트(savant)에게서 종종 나타난다.
신의 피아노
서번트의 능력은 세상을 차폐하여 얻어진 고도의 집중력에서 나온다. 출생기록이 없는 아이는 관청의 눈에 띄지 않도록 평생 여객선에 숨어 살았다. 딱 한번, 그가 뭍에 내리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대도시의 광경에 공포를 느끼고 다시 계단을 올라와버린다. “나는 몰랐어. 세상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무서운지.” 1900의 천재성은 이 광장공포(agoraphobia)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1900에게 세계는 피아노의 건반. 여객선의 공간은 그의 세계다. 피아노의 건반은 88개뿐이나, 그 유한수의 레퍼투아(repertoire)로 무한수의 음악을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건반의 수가 무한하다면? 역설적으로 그때는 단 하나의 음악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세계로 나갈 수 없다. “육지? 육지는 내게 너무 큰 배야. 그것은 너무 아름다운 여자, 너무 긴 여행, 너무 강한 향수야.”
건반의 무한함은 1900을 결정 불능으로 몰아넣는다. “수천개의 길. 어떻게 그것들 중 하나를 선택하지? 그중에서 어떻게 하나의 여자, 하나의 집, 한평의 땅과 하나의 죽을 장소를 고르지?” “너는 내 앞에 수백만개의 키로 된 건반을 펼쳐놓은 거야. 맥스. 그 건반은 무한해. 건반이 무한하다면, 그것으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은 없어. 너는 잘못된 의자에 앉은 거야. 그건 신의 피아노야.”
영혼의 아우라
배를 떠나지 않고도 세상으로 나가는 길은 있었다. 어느 날 1900은 배 위에서 음반을 취입한다. 연주는 선창 밖으로 보이는 소녀의 인상을 감미로운 음향으로 바꾸어놓는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멋진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수백만장을 복제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연주가 축음기를 타고 기계음이 되어 흘러나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마음을 바꾼다. “나 없이는 내 음악이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음반업자는 1900에게 “굳이 배에서 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복제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지금, 여기’의 시공간적 제약을 초월하는 특성이 있다. 가령 말은 늘 말하자는 자의 영혼과 더불어 있으나, 글은 그의 영혼으로부터 떨어져 혼자 돌아다닌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글쓰기를 거부했다. 1900 역시 이 철학자처럼 제 음악이 영혼과 떨어져 돌아다니는 것을 거부한다.
음반업자와 1900의 대화는 복제에 대한 베냐민과 아도르노의 상반된 태도를 연상시킨다. 베냐민은 언제, 어디에라도 원작의 모상을 갖다놓는 복제의 능력을 찬양한다. 반면 아도르노는 ‘지금, 여기서’ 들어야 할 음악을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하는 복제의 타락을 혐오한다. 1900 역시 원판의 대량복제를 거부한다. 수백만장의 복제는 영혼없이 돌아다니는 좀비일 뿐이다.
음악의 폴라로이드
대량복제를 거부하는 1900이 원판 디스크를 보존하려한 것은 의외다. 그는 이를 자신이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건네려 한다. 원판 디스크의 위상은 애매모호하다. 그 역시 엄연히 연주를 복제한 것(duplikat)이나, 동시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물(unikat)이기도 하다. 비록 복제이나 유일물이기에, 은판 위에서 바로 현상과 인화를 했던 초기사진처럼 거기에는 모종의 아우라가 있다.
세상이 폭발하면서 그도 사라진다. 남은 것은 그가 취입한 원판 디스크뿐. 이것이 “태어나지 않은 거나 다름없던” 자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복제이자 유일물인 원판 음반은 역시 복제이자 유일물인 폴라로이드 사진을 닮았다.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위에서 세상이 무서워 나가기를 거부한 아이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 “맥스, 언젠가 너도 나를 잊게 될 거야.”
이 영화가 감동을 준다면, 누구나 한번쯤 세상에 나가기를 두려워했던 원초적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게다. 자궁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아기에게, 바깥세상은 너무 크고, 무엇보다 너무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