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과 법조계 인사 관리 실태를 폭로했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 이름으로 된 계좌가 여럿이고 한 계좌에는 적어도 50억원 이상의 비자금이 은닉돼 있었다고 한다. 검찰 주요 간부들은 정기적으로 500만~2천만원씩 ‘떡값’을 돌리며 관리해왔는데, 판사와 대법관도 관리 명단에 포함돼 있다고 한다. 퇴직 뒤에도 3년간 고문료·자문료 명목으로 월급을 받는 고위 임원 출신의 첫 ‘내부 고발’인데다, 검사를 하다 삼성맨으로 변신해 7년간 그룹 핵심 부서에서 일했던 법조인의 ‘디테일한 폭로’라 주목된다. 그는 앞으로도 삼성이 우리 사회를 ‘오염’ 시킨 실태를 추가로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이를 알린 김 변호사는 자기 얘기를 ‘양심 고백’이라고 했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에 있으면서 호위호식했지만 양심을 잃었다”면서 자신을 “주요 범죄업무 종사자”라고 했다. 또 삼성에서 더이상 ‘사육’ 당하기 싫고, 검사 후배들에게 ‘사기꾼’이 되기 싫어서 삼성을 그만뒀다고 했다.
삼성의 대응은 김 변호사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삼성은 김 변호사 이름으로 된 비밀 계좌는 다른 임원이 재테크를 하느라 돈을 넣어둔 것으로 두 사람의 합의에 따라 이뤄진 ‘차명 거래’일 뿐 그룹의 비자금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김 변호사는 “희생양을 한명 만들어 뒤집어 씌우는 식의 꼬리 자르기를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삼성은 또 각종 매체에 김 변호사의 ‘정신 상태’를 거론하고 돈을 노리고 이번 일을 벌였다는 얘기를 흘렸다. 이것도 그의 예상과 같다.
삼성에 비판적인 시민단체의 회의 결과가 곧바로 팩스로 날아오고, 삼성과 유독 가까운 한 일간지의 정보 보고가 매일 두 차례씩 정해진 시간에 보고되며, 청와대나 국정원과도 정보교류를 하는데다, 삼성의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승진)을 할까 ‘취직’(삼성으로 이직)을 할까 밤낮으로 고민하는 공무원들이 넘쳐나는 ‘삼성 왕국’에서, 김 변호사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삼성의 순기능이 있지만 역기능은 임계점에 다다랐다”며 “삼성 스스로 자정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를 공론화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금융당국과 검찰이 김 변호사의 ‘자수’에도 닷새가 넘도록 뭉개고 있는 것은, 세금 꼬박꼬박 내는 국민의 한명으로서 모욕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