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는다더니 이렇게 조용할 수가. 10월16일 밤 11시, 영화사 직원이 <걸스카우트>의 촬영지라고 일러준 남양주종합촬영소 인근 도로변은 새카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스탭은 간데없는 그때 눈에 불을 켠 자동차들이 속속 달려오기 시작한다. 스탭들은 다른 곳에서 촬영을 마친 뒤 부지런히 달려 이곳으로 넘어오는 길이었다.
이곳에서의 촬영분은 신 60, 그러니까 미경(김선아)과 이만(나문희)이 봉고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걸스카우트>는 동네 미용실 원장에게 곗돈을 뜯긴 세 여자와 얼떨결에 이들을 따라나선 한 여자가 피 같은 돈을 되찾기 위해 펼치는 추격전을 담는 영화. 이 장면에서 봉순 역의 이경실과 은지 역의 김은주가 빠진 채 두 배우만 등장하는 것은 네 여성이 불신과 오해로 각기 헤어졌기 때문이다. 조명과 카메라 세팅이 끝나면 스탭들은 레커 트레일러 위에 자동차를 얹어놓은 채 도로를 하염없이 달리면서 촬영을 하게 된다. <걸스카우트>는 “범죄영화와 코미디가 조화를 이룬 영화”이자 로드무비이기도 하니 스탭들과 배우들이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접속> <괴물> <친절한 금자씨> 등의 포스터를 디자인했고,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 등에서 미술감독을, <사생결단>에서는 음악까지 맡았던 김상만 감독은 신인답지 않게 꽤 여유있는 표정이다. “정해진 개봉날까지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포스터 일을 한 덕에 스케줄 맞추는 데는 능숙한 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가 ‘준비된 신인감독’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2000년 명필름 시절부터 계속 감독 데뷔를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촬영 초반에는 신인감독이라는 점 때문에 불안했다는 나문희도 “찍어놓은 편집본을 보니 참 특이하더라. 만화 같달까. 그때 이후로 걱정을 안 한다”면서 믿음을 드러낸다.
레커가 출발지로 돌아와 세팅을 바꾸는 동안 “이 영화는 밤새는 것만 빼고 다 재밌다”는 나문희는 휴식을 취하고, 김선아는 김상만 감독과 대화를 나눈다. “아니, 제 말대로만 하면 1천만 영화라니깐요.” 귀를 기울여보니 김선아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대사를 패러디하고 있다. 그게 진담이건 농담이건 김선아의 수다를 듣고 있는 스탭들의 얼굴에선 피곤한 기색이 잠시나마 사라진다. “봉고차 안에서 달리는 장면을 찍을 때면 네 여배우의 수다가 너무 재밌다”는 제작진의 이야기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길 위를 떠돌던 레커가 드디어 멈춰섰지만, 스탭들은 다시 짐을 꾸려 길을 거슬러 팔당댐 부근 도로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미경이 눌러뒀던 감정을 터뜨리는 장면을 찍게 된다. 어느새 산 뒤편이 훤해진다. 구리시나 청량리까지 가는 노선버스들과 이른 출근을 재촉하는 자가용들도 기지개 같은 소음을 내며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스탭들은 길가를 오가며 척척 세팅을 마무리하고 있다. 촬영이 끝나는 11월 중순까지, 네 여성이 돈을 되찾을 때까지, 아줌마라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던질 때까지, 스탭과 배우들은 길을 달리고 달릴 것이다.
요즘 어때요?
“8월15일 촬영을 시작했는데 여름뿐 아니라 10월까지 비가 많이 내려 스케줄이 여러 번 미뤄졌다. 90%가 야외 로케이션으로 진행하는 영화다보니 가뜩이나 힘든데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한반도의 기후 변동으로 앞으로는 아무도 여름에 촬영을 안 할지도 모르겠다.”_ 제작사인 보경사 심보경 대표
배우 김선아 인터뷰
“현실에 발을 디딘 여자판 <범죄의 재구성>이다”
-어떻게 출연을 결정하게 됐나. =<범죄의 재구성>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의 여자 버전 같은데 좀더 현실적이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걸스카우트>는 <내 이름은 김삼순>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성을 갖는 것 같다.
-여자배우 3명과 함께 연기한다는 것이 특이한 경험일 것 같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모이면 수다를 떠는데 특히 이경실 언니가 웃겨주신다. 나문희 선생님이야 세번째 함께 작업하는 것이라 너무 편하고, 마음 좋은 이경실 언니, 당찬 김은주와 함께 지내는 것도 즐겁다.
-나문희 선생과는 인연이 깊다. =<S 다이어리> 때는 엄마였고, <내 이름은 김삼순> 때는 남자친구 어머니였다. 이번에는 동네 이웃이지만, 이모나 엄마 같은 관계다. 선생님과 연기를 하면 배울 점이 너무 많다. 그중에서도 다른 배우를 배려해주시는 모습은 정말 본받고 싶다. 스스로도 힘드실 텐데 후배들에게 힘을 많이 주시려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
-어떻게 하다보니 이 영화가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영화가 됐다. 부담은 없나. =아직도 날 보고 ‘삼순이’라고 부르는데,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운 게 있다. 깜짝 놀랄 차기작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과정 자체라고 생각한다. 영화 데뷔작인 <예스터데이>는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지만, 그 현장이 정말 좋았고 지금까지도 그 느낌이 가슴속 깊이 남아 있다. 이번에도 작품을 하는 과정이 즐겁고, 그것이 좋다.
-<내 이름은 김삼순> 때보다 많이 야윈 것 같다. =그놈의 살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어디 나가면 사람들이 살 얘기만 하고, <잠복근무>처럼 센 영화를 한 뒤 바로 살을 심하게 찌우니까 건강도 안 좋아졌다. 결국 1년 정도 뒤에야 살이 빠지더라. 이번 영화에 들어와서 다시 몇 kg가 붙었지만, ‘애 엄마인데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야식도 주는 대로 먹고 있다. (웃음) 하긴 연기도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