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아쉬운 건 무단결석 한번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무단결석보다는 연애를 못해봤다는 것이 더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 시절에는 다른 친구들도 대개 그러했으니 크게 억울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십대에만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정을 겪어보지 못하고 그 시기를 넘어간 건 아무래도 인생에서 뭔가 손해를 본 것 같다.
무단결석은 그 다음으로 아쉬운 일이다. 학교와 집 밖에 모르고 매일이 꽉 짜여 있던 시절, 텅 비어버린 하루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일까. 우리 이후의 세대들을 보면 이른바 범생이든 날라리든 무단결석을 대단한 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무단결석이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1983년이던가. 어느 일요일을 기억한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혜은이가 춤을 추면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화면 밑에 공습경보를 알리는 자막이 깔렸다. 국민 여러분, 이 방송은 실제방송입니다.
전국을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던 그 자막은 북한 공군 장교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남으로 넘어올 때 귀순인지 남침인지 파악이 되지 않던 시점에 나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런 일이 한번 있으면 으레 뒤따르는 행사가 있었다. 이내 여의도에 수십만 군중이 모여 북한 괴뢰에 대한 규탄대회를 여는 거였다.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제 규탄대회에 수십만 군중이 동원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만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삐리들도 인원 동원에 빠질 리 없었다.
우리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학교 하루 안 가면 무조건 그게 더 좋은 거려니 하면서 여의도로 향했다. 한두명도 아니고 수십만명이 모이는데 거기서 어떻게 우리 학교 학생들이 모이는 지점을 찾고, 담임을 찾아 출석 체크를 하겠는가. 게다가 그날은 비까지 내렸으니 그냥 하루 땡땡이를 치고 나중에 담임을 못 찾았다고 뻥을 쳐도 그럭저럭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의도 광장에서 수십만개의 우산을 헤집은 끝에 담임을 찾아내어 출석 체크를 했다는 사실. 그야말로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석하면 안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천재지변이 있던 날에도 우리는 학교에 갔다. 1983년의 초가을에 있었던 기록적인 수해. 뭔일만 있으면 규탄해댔던 북한 괴뢰가 본분을 망각하고 인도주의에 근거, 원조물자를 보내주기까지 했다. 어찌나 비가 많이 왔던지 산 중턱에 있는 학교에 올라 보니 운동장이 커다란 호수가 되어 있었다. 운동장에 고인 물은 허리 높이까지 차올랐다. 학교 주변 언덕길에 있는 담벼락들은 물줄기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내렸고 그 사이로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결국 휴교령이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학교에 갔다. 한 시간 늦은 놈도 있고, 두 시간 늦은 놈도 있고, 세 시간 늦은 놈들도 있었지만 모두들 어찌어찌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서 학교에 왔다. 합법적으로 눈치껏 결석할 수 있는 기회에도 그렇게들 기어이 학교에 왔으니, 무단결석의 개념이란 우리의 머릿속에 아예 탑재되지 않았던 거다.
그 무렵, 나는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무슨 고뇌였는지 간단히 말하자면, 도대체 사는 게 뭔지! 하는 거였는데, 어느 날엔가 고뇌가 너무 깊어져서 도저히 학교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더라는 거지. 그리하여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야간자율학습을 쌩까고 교문을 나섰다. 이렇게 말하면 비웃을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도 조금은 쪽팔리지만, 고등학생 때 담배 한 모금, 술 한 방울 입에 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게 나름대로 커다란 일탈이었다.
막상 교문을 나섰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고뇌를 안고 집에 갈 수야 없는 노릇. 버스에 올라타고 시내로 나갔다. 서대문, 광화문, 종로. 서울 변두리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곳이 서울의 중심이었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세상의 중심의 문턱, 서대문에 내려보니 갈 곳 없는 나 같은 청춘을 위해 아줌마들이 영화 할인 티켓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브루스 브라더스>, 푸른극장.
세상에는 스크린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화도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나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원없이 웃어댔다. 인생에 대한 고뇌? 사는 게 뭔지? 알게 뭐냐. 인생은 아름다워라.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 한편으로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는 건 거짓말이다. 다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세상, 스크린 속으로 빠져드는 건 행복하여라.
그때부터 극장에 가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버스 토큰 두개와 극장비만 있으면 시내로 나갔다. 이후 <브루스 브라더스>보다 더 웃기고 더 재미있는 영화도 많이 보았다. 묵직한 감동을 준 영화도 많다. 슬픔에 잠기게 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 짓게 한 영화도 많다. 그 수많은 두 시간짜리 행복들을 뒤로하고 <브루스 브라더스>를 ‘내 인생의 영화’로 꼽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일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영화로 인해 극장에서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곧 내 인생의 첫 영화인 셈이다. 그런 영화를 어찌 잊겠는가. 어느 한순간 온통 넋을 앗아갔던 첫 키스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황홀했던 첫 키스라 해도 살다보면 아예 잊고 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