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언니네의 똘똘한 초등학생 딸은 책상에 “공부만 하자”라고 써붙여놓았다. “1등 안 해도 되니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얘기하면 “난 1등 안 하면 더 스트레스받으니까 그런 말 말라”고 신경질을 낸다. 또 다른 언니네의 더 똘똘한 중학생 딸은 부모에게 학원비며 과외비며 차라리 돈으로 모아 달라는 협상을 하고 있다. 자기 세대는 ‘십장생’(십대도 장차 백수가 될 것을 생각한다)이니 밑빠진 독에 물 붓지 말라는 이유있는 주장이다.
아이 1명을 고등학교 마친 뒤 바로 4년제 대학에 진학시켜 휴학없이 졸업시키려면 2억3200만원이 든다는 조사 결과를 얼마 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았다. 고등학교만 마쳐도 1억7300여만원. 으헥. 교육비, 식품비, 의료비, 의복비, 용돈, 기타 등등이 망라된 돈인데, 그냥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고 옷도 대충 얻어 입히고 최소한의 공교육 경비만 지불한 뒤(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나머지를 앞서 ‘십장생’의 제안처럼 꼬박꼬박 모으면, 애가 성인이 됐을 때에는 이자가 붙어 목돈이 되지 않을까? 그때 그 돈으로 뭘 하건 지가 알아서 하겠지(갑자기 딸과 내가 나란히 앉아 공공근로를 하는 모습이…).
앞 세대보다 훨씬 더 정성껏 돈 들여 키운 20대들이 태반은 백수로, 나머지의 태반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오늘날의 20대를 일컫는 ‘88만원 세대’의 88만원은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 노동자의 임금 비율 74%를 곱한 수치로, 그나마 세전이다). 세상 살기 좋아졌고 국부도 커졌는데 왜 이리 팍팍할까. 많은 학자들은 ‘고용없는 성장’의 그늘이라고 얘기한다. 대선을 앞두고 대부분의 주자들이 경제성장을 강조하니, 더 겁이 난다. 이러다 진짜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서, 놀까봐.
사정이 이러한데도 혹은 사정이 이러한 탓인지 교육현장의 무한투쟁은 가속이 붙어, 과학고를 겨냥한 유치원반을 운영하는 학원까지 성업 중이다. 많은 부모들이 내 아이가 어쩌면 1등할지 모른다는 요행과 꼴등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한 척추치료 전문병원에서 조사한 걸 보니 고교생 10명 중 7명은 허리와 등의 통증을 호소한단다. 63.2%는 하루 12시간 이상, 29.6%는 8~10시간을 앉아서 보낸다. 93%에 이르는 애들이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지낸다는 얘기인데, 출구가 안 보인다. 어른이 되면 놀 수 있다는, 아니, 일하고 싶어도 놀게 된다는 말이 위로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