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분을 발랐다. 여성들은 다 그랬다. 네댓살 계집아이에서 팔순의 할머니까지 몽땅 하얀 분을 바르고 다녔다. 양볼은 기본이었다. 코와 이마에도 발랐다. 일부 남성들도 발랐다. 도대체 뭘 바른 거지? 1년 전 타이 북부에서 ‘하루 비자’를 얻어 넘어간 버마 국경지역 트리파고다스파스의 풍경은 신기하고 낯설었다.
‘타나카 즙’이라고 했다. 버마에서 자라는 타나카 나무줄기로 만든 천연 화장품이었다. 피부를 차갑게 해주고 모공을 수축시키며, 피지 제거에 선크림 역할까지 한다는 것이다. 타나카로 분장한 듯한 얼굴 탓인지 주민들은 더없이 순박해 보였다. 타이와 접해 있는지라 외지인들이 수없이 들락거릴 텐데 전혀 ‘관광지’다운 공기는 흐르지 않았다. 거리의 꼬마들과 여성들은 지나치게 수줍음을 탔다. 짧은 시간에도 단박에 끌리는 나라였다.
내가 갔던 트리파고다스파스는 원래 무장 게릴라들의 주요 출몰 지역이었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여행객들에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1988년 8월과 9월에 랑군 등 버마 각지에서 벌어진 유혈극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수천명의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국경 밀림지역으로 몰려오게 했다. 대학살에 치를 떨며 피신 온 젊은이들의 유랑이었다. 그들은 트리파고다스파스와 매솟 등 타이-버마 국경지역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을 조직했다. 그리고 정부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대학생들이 총을 든 것이다. 90년대 초·중반의 이 산악 전투로 450여명이 목숨을 잃고 30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 버마를 좀더 여행하고 싶었다. 트리파고다스파스 다음의 목표는 랑군이었다. ‘아시아의 숨은 보석’이라는 표현답게 여행지로서의 매력도 있지만, 정치적 상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공포영화 같기도 하고 코미디 같기도 한 군사독재정권의 폭정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예전에 잡지를 만들면서 버마문제를 워낙 많이 다룬 탓이기도 했다. 버마에 관한 기사가 나갈 때마다 순진한 독자들은 물음을 던졌다. “‘미얀마’라 안 하고 왜 ‘버마’라고 쓰나요? 왜 ‘양곤’이 아닌 ‘랑군’이죠?” 10년간 똑같은 답변이 지루하게 되풀이됐다. “1988년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정권이 나라와 수도 이름을 맘대로 바꿨습니다. 양식있는 외신과 일부 국가들은 군사정권을 인정할 수 없기에 아직도 옛 이름을 고집하지요.” 최근 버마 군부의 유혈극이 다시 터지면서 국내 언론은 이 사건을 경쟁적으로 키웠다. 왜 버마와 미얀마, 랑군과 양곤이 혼재되어 표기되는지는 상식이 될 정도로 이 땅에서 버마는 유명해졌다. 하지만 당분간 랑군행 배낭을 꾸리는 일은 난망하다. 비자발급 허가를 받기조차 쉽지 않으리라.
추석 직후 버마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긴 텍스트를 읽었다. 곧 출간될 <아웅산 수치와 버마>(가제·<푸른숲>)의 교정본이었다. 홍콩 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의 전 타이 특파원이었던 버틸 린트너가 버마의 현대사와 아웅산 수치 가문의 이야기를 풀어낸 내용이다. 이런 책들이 쏟아지면 버마를 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더욱 깊고 진지해질 듯하다.
한국과 버마의 현대사는 비슷한 박자로 호흡해왔다. 한국은 1948년 8월15일에, 버마는 1948년 1월4일에 독립공화국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한국에선 김구가, 버마에선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이 암살당했다. 한국에선 1961년 5월16일 박정희의 쿠데타가, 버마에선 1962년 3월1일 네윈의 쿠데타가 성공했다. 1987년 6월엔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이 폭발했고, 1988년 8월엔 ‘랑군의 봄’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부터 운명은 엇갈렸다.
버마의 현대사를 짚어보면 한국의 옛 군사독재정권 지도자들에게 고마움이 느껴질 정도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악행은 버마의 네윈이나 소오마웅, 탄수웨의 그것에 비하면 초라해 보였다. 두 나라에서 반대파들은 모두 가혹한 탄압을 받았지만, 한국의 수준은 감히 버마와 어깨를 겨룰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2년 7월7일의 랑군대학 학생회관 폭파사건이다. 그곳은 버마 민족주의 운동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15명이 폭사했다. 화끈하지 않은가? 1988년은 더 화끈했다. 그해 9월 소오마웅과 탄수웨의 지휘 아래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부상자들을 치료 중인 랑군종합병원에서 사격중지를 호소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향해서까지 조준사격을 했다. 그해의 군 발포로 3천여명이 죽었다. 시민들의 목을 자르는 참수까지 이뤄졌다. 한국의 뜨거웠던 6월 항쟁으로부터 불과 1년 뒤 생긴 일이었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노동운동으로의 투신을 고민할 즈음에, 버마의 대학생들은 무장투쟁으로의 투신을 고민해야 했다. 한국의 6월 항쟁 기간 동안에도 계엄령과 공수부대 투입설을 화제로 수군거리던 기억이 난다. 1980년 5월의 교훈이 있었겠지만, 전두환과 노태우는 결국 참았다. 적어도 발포의 충동은 이겨낸 셈이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5월 광주에 관한 책 제목이 떠오른다. 지금 버마에 딱 적합한 카피다. 넘어야 하는, 그러나 넘으려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 할리우드영화 <비욘드 랭군>이 아닌, 버마 인민들의 드라마틱한 승리를 담은 ‘비욘드 랭군’이 현실의 영화로 상영되기를 기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