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u, a, r, a, n, t, i, n, e….” 욕조 위에 알몸으로 선 아이에게 엄마가 다가와 아이의 몸을 닦아주며 한 글자씩 철자를 늘어놓는다. 영화의 첫 대사(‘멸균’)는 아이의 일생을 지배하다 결국 그를 파멸로 몰아갈 강박장애(OCD)를 암시한다. 하워드 휴스는 평생 세균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았다. 이는 같은 증세를 가졌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이의 몸에 비누칠을 하며 엄마가 말한다. “너는 안전하지 않아.”
지옥의 천사들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하워드 휴스. 하지만 그는 영화와 비행에 사로잡혀 있었다. 회사의 운영을 다른 이에게 맡긴 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영화의 제작에 몰두한다. 블록버스터 <지옥의 천사들>(1930)을 위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민간 비행장을 만든다. 영화 속의 뉴스 릴은 공중전의 촬영에 “87대의 항공기, 137명의 조종사, 35명의 카메라맨, 2000여명의 전문가”가 동원됐다고 전한다.
하지만 필름에 찍힌 비행기에서는 속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속도감을 주려면 “비행기 뒤로 뭔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 “젖으로 가득 찬 젖가슴 같은 구름”을 위해 그는 UCLA의 기상학자까지 동원한다. 비행기 그늘 아래에 앉아 빈둥거리는 조종사들에게 “하루에 5271달러”를 지불하며 8달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구름이 끼었다는 말을 듣자, 즉시 그리로 프로덕션을 옮긴다.
촬영을 마쳤을 즈음에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한다. 그새 토키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저것이 바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야. 무성영화는 어제의 뉴스야.” 원래 무성으로 제작된 영화를 토키로 바꾸는 데에 또다시 1년의 세월과 170만달러의 비용이 더 들어갔다.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잡아먹은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테스트 파일럿
휴스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강박은 비행이었다. 1935년, 그는 자기가 직접 제작한 H-1 레이서를 몰고 시속 352마일(563km)에 도달해 린드버그의 종전 기록을 갈아 치운다. 4년 뒤에는 종전 기록을 3일 앞당겨 4일 만에 세계일주를 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로써 그는 어린 시절부터 꾸어왔던 꿈, 즉 “지구 위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되겠다던 꿈을 이룬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는 미 공군에서 H-1 레이서를 차세대 전투기의 모델로 채택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 요구는 거절당하고, 그 결과 미군은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군 제로센의 우수한 성능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한다. 훗날 휴스는 “일본군이 자신의 H-1 모델을 모방했다”고 격노했다고 한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실제로 제로센의 디자인이 H-1을 닮은 것은 사실이다.
1946년, 그는 정찰기 FX-11를 개발하여 직접 시험비행을 하던 중 엔진 고장으로 베벌리힐스에 추락한다. 휴스의 비정상적 상태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육체적 고통을 잊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이 비행기 역시 미군의 정찰기로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그는 또 다른 비행기(H-4 허큘리스)를 개발하고 있었다.
미래의 길
휴스에게 영화와 비행은 동시에 사업이었다. 세계일주에 성공한 휴스가 개선 퍼레이드를 하는 동안 팬암의 회장은 부하 직원에게 휴스가 경쟁사인 TWA의 최대 주주가 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무슨 소리야? 휴스는 비행기 타고 세계일주를 하던 중이었다며.” “예, 비행 중에 무전기로 했답니다.” 문제는 장거리 비행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면서 미국-유럽 노선을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병증이 도져 칩거에 들어간 휴스를 향해 적들의 공격과 회유가 시작된다. 1947년 8월 팬암과 결탁한 상원의원이 휴스를 청문회에 세워놓고, 국방성에서 5600만달러를 받고 왜 비행기를 납품하지 않았느냐고 몰아붙인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지요?” 휴스는 모든 돈은 수송기 개발에 썼으며, 거기에 자기 돈까지 더했다고 반격한다. “비행은 내 삶의 커다란 기쁨이기에….”
팬암쪽에서 자신에게 TWA 지분의 매각을 요구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청문회는 휴스의 승리로 끝난다. 얼마 뒤 그는 직접 조종간을 잡고 “5층 높이에 축구 경기장만한 윙 스팬”을 가진 거대한 비행체를 공중에 띄우는 데에도 성공한다. 시험비행을 마치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는 세 사내의 환영(?)을 보고 발작을 일으켜, 강박적으로 같은 말을 토해놓기 시작한다.
비행과 영화
영화 촬영을 위해 양쪽 날개에 카메라를 장착한 휴스의 복엽기는 매우 상징적이다. <전쟁과 영화>에서 폴 비릴리오는 영화를 비행에 비유한 바 있다. 영화와 비행은 시공에 대한 고전적 관념을 파괴한다. 비행은 시공간을 단축시키며, 영화는 시공간을 새로이 조립한다. 영화와 비행과 더불어 신체로 체험하는 자연적 시공간의 자리에 기계로 조립되는 인공적 시공간이 들어선다.
베냐민 역시 영화를 자연적 시공간의 ‘감옥’에서 해방시켜주는 매체로 보았다. “영화가 등장함에 따라 이러한 감옥의 세계가 10분의 1초의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됨으로써 우리는 사방으로 흩어진 감옥세계의 파편들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게 모험에 가득 찬 여행을 시도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을 ‘지금, 여기’의 제약에서 벗어나 도처로 날아다니는 비행사로 만들어준다.
실제로 비행은 피크노렙시를 닮았다. 활주를 하던 바퀴가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마치 세상에서 철수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비행한 거리에 비해 시간은 별로 흐르지 않아, 때로는 정확히 이륙했던 바로 그 시간으로 착륙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공간에 관해서도 비행은 완전히 다른 시각장을 열어준다. 세계를 줌인하려면 고도를 낮추라. 줌아웃하고 싶은가? 스틱을 당기라.
시간의 지배자
비릴리오는 휴스의 집착에 흥미로운 해석을 가한다. 하루도 매스컴을 타지 않은 날이 없던 이 유명 인사(everything)가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도처에 있으면서 또한 아무 곳에도 없어야 한다.” 세계일주를 마친 그는 정확히 나흘 전에 이륙했던 비행장에 착륙했다. 비릴리오는 이를 “머물 곳이 도래하는 것을 보려는 욕망”의 소산으로 푼다.
도처로 날아다니던 휴스는 47살의 젊은 나이로 돌연 유폐생활에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베냐민은 영화가 인간을 세상의 모든 곳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반면 귄터 안더스는 미디어를 통해 인간은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모든 곳을 날다 밀폐된 공간에 착륙한 휴스는 서로 대립되는 이 두 명제를 하나로 종합한다.
어느 날 그의 밀폐된 호텔 방으로 미키마우스로 변장한 디즈니사의 홍보단원이 찾아왔다. “전설적인 영웅은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대중과 숨바꼭질을 해야 하는 법이죠.” 이런 찬사와 함께 그는 휴스에게 미키마우스 시계를 선물한다. 물론 휴스는 이 선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하긴 자신의 시간을 천문학적 시간으로 떼어놓은 “시간의 지배자”에게 시계 따위가 왜 필요하겠는가?
미래의 길
“너는 안전하지 않아.” 홀연한 환청과 함께 영화의 끝은 처음으로 회귀한다. 욕조 속의 아이가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빠른 비행기를 몰고, 세상에서 제일 큰 영화를 만들고,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될 거야.” 그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이루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의 입은 화장실 세면대 위에 강박적으로 같은 말을 토해놓는다. “미래의 길, 미래의 길, 미래의 길….”
미래의 길은 유아기의 원체험으로 돌아가고, 세계의 비행은 밀폐된 호텔 방에 안착한다. 세인의 눈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도처에 있으면서 어느 곳에도 부재하며, 어제 그리고 내일 존재한다고 여길 수 있었다.” 도처에 있으면서 아무 데도 없는 것을 유대인들은 ‘알렙’이라 부르고, 어제이면서도 동시에 내일인 것을 니체는 아마 ‘영겁회귀’라 부를 것이다.
비행과 영화에 사로잡혔던 “테크놀로지의 수도사”의 욕망은 알렙과 회귀의 체험이 아니었을까? 밀폐된 호텔 방의 영사기도 그의 입처럼 강박적이어서 인공창(스크린) 위에 종종 같은 영화를 반복적으로 토해놓곤 했단다. 150번씩 반복되는 영화는 그의 모든 시간을 흘리면서도 늘 같은 시간대에 머문다. 그것은 그를 모든 곳으로 데려다주면서 동시에 아무 데로도 데려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