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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우화, 판타지와 환각, 공간과 인물을 입체파 회화처럼 배열한 <스틸 라이프>

비범하고 위대한 추상의 영화

올해 1월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스틸 라이프>를 처음 만났을 때, 뜻밖에 네덜란드어 자막밖에 없었기 때문에 많이 힘겨웠다. 인물들간의 관계를 짐작하느라 헉헉거리는 와중에 지난해 베니스에서의 황금사자상 수상과 그 이후에 쏟아진 찬사에도 불구하고, 그 찬사에 대해 가졌던 얼마간의 의구심을 다시 떠올렸다. 유럽 영화계가 제3세계의 상황을 리얼하게 묘사한 영화를 상찬할 때, 거기에는 1세계 지식인의 죄의식 혹은 좌파적 노스탤지어가 작용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나는 지우지 못하고 있다. 제3세계 민중의 고통스런 삶, 저개발의 황량한 공간은 그들의 화석화해가는 좌파적 정서에 일종의 흥분제 역할을 할지 모른다는 의심 같은 것이다.

이것이 1세계 부르주아의 오래된 이국 취향의 충족보다는 세련된 것이라도 해도, 또한 그것이 크리스 마르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파트리시오 구스만의 <칠레 전투>의 완성을 도왔듯이 드물게 정치/예술적 연대로 발전한다 해도, 대개의 경우 영화에 등장하는 제3세계의 가난한 육체와 공간은 결국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외설성을 지니게 되는 건 아닐까. 허우샤오시엔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요소가 약화되고 형식에의 탐구가 본격화하면서, 유럽 영화계의 관심이 줄어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슬픈 다큐멘터리이고 참혹하고 아름다운 풍경화

3년 전 선동적인 다큐멘터리 <화씨 9/11>에 최고상을 수여함으로써 좌파 콤플렉스를 여지없이 노출했던 칸영화제가 지난해에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황금종려상을 안겼을 때 그 의구심은 더 깊어졌다(나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싫어할 수 없었지만 이 영화는 켄 로치의 가장 관습적인 신파영화다). 그들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90살 노인이 처녀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몇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열정을 회생시킬 연민과 분노의 대상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 해도 나는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것이 영화예술의 이름으로 옹호될 일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거의 따라가지 못한 채 <스틸 라이프>의 괴기스런 형상으로 무너져가는 싼샤(三峽)의 건축물과 노동자들의 어두운 육체를 보면서 그 의심이 상기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을 비추는 것만으로 단번에 시선을 붙들어 매는 저런 공간을 자신의 땅에서 찾을 수 있다면, 감독으로선 재능과 관계없는 특혜가 아닐까.

서울에서 <스틸 라이프>를 온전히 만났을 때, 나는 모든 의심을 기쁘게 접었다. 지아장커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간 곳에서 그 공간과 사람들로부터 강렬한 느낌을 받아, 3일 만에 시나리오를 쓰고 이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스틸 라이프>는 면밀한 구상과 준비의 산물이 아니라, 현장의 어떤 기운에서 비롯된 한 창작자의 직관과 본능이 거의 전부를 채워간 영화다. 믿기 힘든 일이다. 그는 시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또 다른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스틸 라이프>는 그들을 합쳐놓은 것보다 더 깊고 넓다. 슬픈 다큐멘터리이며, 비범한 시이고, 참혹하고 아름다운 풍경화이자 인물화이며 무엇보다 위대한 영화인 <스틸 라이프>를 몇 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잊을 수 없는 몇 장면이 준 감흥의 윤곽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두루마리그림처럼 찍힌 공간과 인물들

지아장커는 리샤오동이라는 화가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싼샤에 왔다. 그곳에서 2천년 동안 존재했던 도시가 댐건설로 2년 만에 사라지는 싼샤의 참담한 풍경과 침묵하거나 소란을 피우지만 결국 순응하는 인민의 몸을 보았다. 그것을 별도의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해도 그 다큐멘터리는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지아장커는 극영화를 택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씨네21> 575호) 그런데 픽션을 찍는 카메라가 그들의 비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간다는 말일까. 카메라는 피사체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기계가 아닌가.

이야기는 16년 전에 떠난 아내를 찾아 싼샤에 온 중년 노동자 한산밍과, 2년째 소식이 끊긴 남편을 찾아 싼샤에 온 간호사 셴홍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처음에 ‘싼샤의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훌륭한 원제(三峽好人)를 직역하지 않은 ‘Still Life’라는 영어제목이 좀 의아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어제목이 소름 돋을 만큼 이 영화의 심장에 가까운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스틸 라이프’의 본래 의미는 정물(靜物), 움직이지 않는 혹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대상이다. 미술사에서 정물은 회화의 대상이 신이나 영웅과 같은 외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과 함께 회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이때 정물은 정지한 시간 위에 하나의 그림 안에서 별도의 의미없이 어떤 형태와 색채로 환원되는 하나의 형식이다. 그러나 한때 화가 지망생으로 많은 정물화를 그렸던 지아장커는 정물을 영화라는 시간-움직임의 배열 안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스틸 라이프>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움직임에 관한 영화’다. 시간이 개입한 3차원의 화폭 위에서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피사체가, 때로 움직이고 때로 멈춘 카메라와 만나 빚어내는 긴장과 조화에 관한 영화. 종종 공간을 인물처럼 찍고 인물을 정물처럼 찍는 지아장커가 그들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는 방식은 그 움직임과 멈춤의 드러냄이다. 나는 <스틸 라이프>의 모든 장면들에서 피사체와 카메라의 움직임만 분석한다 해도 방대한 논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움직임의 한가운데 회화에서와는 다른 의미로 살아난 정물들과 지아장커 스스로 두루마리그림(手卷畵)의 방식으로 부른 수평트래킹숏이 있다.

인물 사이를 떠도는 정물들

<스틸 라이프>에서 정물은 회화에서의 정물과 이중적으로 연관된다. 이 영화의 중간제목처럼 등장하는 담배, 술, 차, 사탕은 말 그대로의 정물들이다. 지아장커는 중국 인민들은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믿는 대상들이기 때문에 등장시켰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가파른 시간의 흐름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대상들의 배열 틈에 정물이 등장하는 순간 그 정서적 효과를 잘 알고 있다. “언젠가 나는 누군가의 방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책상 위에 놓인 먼지 쌓인 기사를 보고 있었을 때, 갑자기 이곳이 한폭의 정물화 같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낡은 가구와 책상 위의 잡동사니들, 창틀에 놓여 있는 빈 병,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 모두가 내겐 어떤 시적인 슬픔을 지닌 풍경으로 느껴졌다.”(지아장커, ‘제작노트’ 중에서)

<스틸 라이프>에서 지아장커가 말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장면이 있다. 16년 전에 떠난 아내가 살고 있다고 믿은 곳이 이미 10년 전에 물에 잠긴 것을 보고, 관할 사무소의 멈춘 컴퓨터에서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중년 사내 한산밍이 1.2위엔짜리 방에 들어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을 때, 그의 멍한 시선에 들어온, 담배와 갖가지 양념병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구질구질한 탁자. 한산밍의 모습에서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수평이동하다 멈춰 잡은 이 장면은 정말 정물화처럼 찍혀 있다. 그리고 ‘담배’라는 첫 중간제목이 오른쪽 하단에 수줍은 듯 떠오른다. 10년 늦게 도착한 사내에게, 맹렬하게 앞으로 질주하는 세상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을 때, 그의 눈앞에 비친 초라한 사물들의 한없는 침묵과 정적. 이 장면이 그토록 감동적인 것은 미친 듯이 달려가는 괴물로서의 시간이 현재를 끝없이 폐허화하는 영화 안에서 이 작고 친근한 사물들의 무심한 고요가 거의 유일한 휴식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틸 라이프>의 이 정물들은 정물화의 대상처럼 멈춰 있지 않고 인물들 사이를 떠돈다. ‘담배’ 다음에 ‘술’, ‘차(茶)’, ‘사탕’의 중간제목이 차례로 등장한다. 지아장커는 이 정물들의 역할을 균질화하거나 그들에게 어떤 규칙을 부여하지 않는데, 이것은 추상적 질서 안에 구체적인 것을 배열하기를 원치 않는 그의 훌륭한 선택이다. 한산밍의 담배는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정체불명의 소년이 집어가며, 허풍쟁이 건달 마크에게는 마지못해 준다. 한산밍이 아내의 오빠에게 주려고 가져온 술은 아예 건네지지 못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셴홍은 옛날에 남편에게 보낸 차(茶)가 남편이 일하던 공장의 사물함에 있는 걸 발견하고 들고 나온다. 마크는 죽던 날 아침 한산밍에게 사탕을 주었고, 한산밍은 이것을 나중에 아내를 만났을 때 전해준다.

정물들은 타의로 건네지거나(담배), 건네지지 못하거나(술), 건네졌다가 돌아오며(차), 건네지고 다시 건네진다(사탕). 정물들은 차츰 움직임의 범위를 넓혀가지만 그것의 크기는 너무 작고 그 범위는 너무 왜소한 것이어서 실은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마크의 사탕을 한산밍이 먹든 그의 아내가 먹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에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아내를 되찾을 돈을 마련하기 위해 산시(山西)의 광산으로 돌아가려는 한산밍은 전날 밤 동료 철거노동자들과 환송 회식을 하며 동료들에게 담배 한 개비씩 돌리고, 마지막 한 개비는 프레임 왼쪽 밖의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던져준다. 그들은 광산 일이 위험하지만 보수가 높다는 것을 알고 한산밍과 동행하겠다고 말한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카메라는 왼쪽으로 수평이동한다. 카메라가 멈추면 그곳에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삐딱하게 벽에 기대 있는 동료 하나가 히죽거리는 얼굴로 좀 전에 한산밍이 건네준 담배를 피우며 동료들을 쳐다보고 있다. 이 장면의 감동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이동하며 싼샤행 배에 오른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차례로 담는다. 신시사이저에 실린 중국의 전통 가곡이 흐르고 포커스 아웃이 세번 반복되는 이 우수어리고 몽환적인 수평트래킹숏의 끝에 멍하게 싼샤 쪽을 쳐다보고 있는 한산밍이 등장한다. 두 장면은 정확히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지만, 여기에는 소외와 분리가 동조와 연대로의 이행이라는 낙관의 가냘픈 전망이 은밀하게 작용한다. 물론 낙관의 전망 자체가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후자의 환송회 장면의 신비한 점은, 담배가 카메라를 수평이동시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한산밍이 프레임의 왼쪽 밖에 담배 한 개비를 던지는 작은 사건이 있었고 아주 짧은 시간이 흐른 뒤에 카메라는 그곳으로 시선을 이동한다. 그 시간 동안 그 사건을 잊지 않은 카메라가, 주요 인물도 아닐뿐더러 지금껏 정면으로 얼굴을 본 적조차 없는 익명의 인물에게, 게다가 받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 외엔 어떤 의미있는 행동도 하지 않는 그에게 이동해 멈출 때, 카메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도구이기를 멈추고 어느새 그들 안으로 들어가 있다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 담배는 기적의 담배이고 위대한 정물이다.

비범한 추상의 영화

흥미롭게도 정물과 정반대의 물리적 속성을 지닌 물은 이 영화에서도 담배의 반대편에 서 있다. 한산밍이 담배를 나눠 피우는 동안, 셴홍은 물을 혼자 마신다. 물 위에서 사람들은 엇갈리고, 한산밍의 아내는 배를 타고 떠나려 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살던 마을은 거대한 물속에 잠겨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마크의 시체를 강물에 띄워 보내려 할 때, 철거반원들이 건물 외벽에 ‘3기 156.3m’라고 쓰며 곧 차오를 물의 높이를 적을 때, 물은 시간과 공모하며 현재를 떠내려 보내는 괴물로 예감된다.

담배라는 정물이 인물들 사이에 건네지며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동안, 싼샤의 사람들은 오히려 정물이 되어 굳어간다. 인상적인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셴홍이 남편이 일하던 공장에 왔다가 허탕치고 돌아갈 때, 좀 전에 공장장에게 항의하던 팔 잘린 사내와 그의 여동생은 셴홍 후면의 자전거 옆에서 마치 동상처럼 굳은 채 서 있다. 또 다른 장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마크를 식당에서 기다리는 한산밍의 숏에서 카메라가 옆으로 이동하면 분장한 두 경극배우가 유령처럼 앉아 있다. 자세히 보면 그들은 작은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있지만, 손끝 말고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앉아 있어서, 이 장면은 귀기마저 풍긴다.

라스트신은 동료들과 함께 떠나는 한산밍의 시선으로 무너져가는 고층 건물 사이에서 사람들이 홀린 듯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 원거리에서 동작으로만 보이는 괴이한 그러나 압도적인 장면이다. 그들은 수몰과 철거의 와중에 죽은 이들의 원귀일까. 아니면 모든 건물이 잠겨버린 미래에 건물 사이를 오가는 싼샤 사람들의 모습의 예시일까. 아니면 유령처럼 혹은 정물처럼 한산밍과 셴홍의 곁에 있던 사람들의 현재일까. 모르겠다. 다만, 이 라스트신은 전 장면에서 담배를 나누던 노동자들의 소박한 연대, 가냘픈 낙관의 전망에 드리워진 아득한 불안의 그림자, 혹은 그들에겐 담배를 나누어주지 못하는 죄의식의 환각처럼 보인다.

<스틸 라이프>는 비범한 추상의 영화다. 순수 추상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과 우화적인 것과 판타지와 환각이 마치 입체파 회화처럼 한 시공간에 배열된 영화다. 남자 이야기가 진행되다 중간에 전혀 다른 톤의 여자 이야기가 끼어들어 완결된 뒤 다시 남자의 이야기의 진행되는 이상한 구성도 입체파적인 발상이다. 지아장커는 이 모든 것을 형식에 대한 자의식으로 드러내지 않고 노동자의 육체의 구체성 안에 새겨넣었다. 더 빨라지고 더 기괴해지고 더 해독할 길이 없는 괴물 같은 세계를 단단하나 왜소한 노동자의 그을린 육체가 그것에 필사적으로 순응하며 낙오된 자들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느리게 걸어간다. 이 광경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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