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한 그림자가 온 지구면을 덮고 있는 요즘, 채털리 부인의 해피엔딩을 향해 데이비드 매킨지 감독의 <어사일럼>은 이렇게 묻는다. “욕망을 억압하는 신분사회로부터 ‘영원히’ 도망갈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와 교도관들이 지배하는 ‘어사일럼’(정신병에 걸린 범죄자들의 수용소)의 ‘외부’라는 것이 있기나 한가?”
1950년대 영국 북부의 한 ‘어사일럼’. 정신과 의사인 남편(휴 보네빌)을 따라 아들 찰리와 함께 사택으로 이주해온 스텔라(나타샤 리처드슨)는 무료하기만 하다. 출세주의자에 질투심 가득한 남편은 일에만 몰두하고 다른 의사 부인들과의 친교는 의례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사택 정원을 가꾸던 에드가(마튼 크소카스)와 그녀의 눈이 마주치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관계로 치닫는다. 줄거리의 앞부분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둘이 벌이는 긴박감있는 옥외정사에 할애되고, 후반부는 연이은 두 남녀의 탈출과 탈출 이후의 여정에 할애된다.
고전이 된 <채털리 부인>의 도식에 비해 이 영화가 현대적인 것은 몇 가지 변수들 때문일 것이다. 먼저 에드가의 상태가 관객을 불안케 한다. 의처증으로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전력이 있는 에드가의 품에서 그녀는 과연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계급’이라는 강을 건넜더니 ‘젠더’라는 봉우리가 기다리는 격이다. 다음으로 두 남녀의 진정한 적수는 무능하고 옹졸한 스텔라의 남편이 아니라 에드가의 주치의인 피터 박사(이안 매켈런)다. 다른 이들이 격정에 휩싸여 우왕좌왕할 때 영악한 피터 박사만이 ‘과학자답게’ 사태의 흐름을 주시하고 원하는 것을 하나씩 차지한다. 또, 찰리에 대한 엄마로서의 의무감은 의사 부인이라는 기득권과는 달리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끝까지 그녀의 내적 결점으로 작용한다.
스텔라의 크게 뜬 눈, 늘 불안한 자태, 아름답지만 마네킹 같은 표정이 흥미롭다. 중성화된 그녀의 표정은 작품 전체의 음험한 정신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데이비드 매킨지 감독은 전작 <영 아담>에서도 이와 비슷한 시도를 했지만 거기서만큼의 성공을 <어사일럼>에서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이완 맥그리거의 매혹적이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죄의식이 메아리칠 수 있었던 것은 주위 환경(수면과 강어귀)을 치밀하게 상징 기호화했기 때문이다. 반면 <어사일럼>의 카메라는 관객의 심미적 만족에 집착한다. 고전적이고 지적인 외양에 매달림으로써 권력의 그물을 비집고 나오는 끈적거리는 욕망과 그 욕망이 비극적으로 붕괴되는 효과를 반감시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