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더버그의 1940년대 고전을 향한 오마주
<굿 저먼> The Good German
DVD를 넣고 영화가 나올 때 당황하지 말 것. <굿 저먼>은 60년 전에 찍혔음직한 스탠더드 화면비율의 흑백영상과 고풍스런 음악으로 시작한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이 개봉되지 못하고 DVD로 직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1940년대의 할리우드 드라마를 표방한 영화를 찍고 싶었던 소더버그는 옛날 장비들을 동원하고 세트에다 폐허가 된 베를린을 되살렸다. <굿 저먼>은 전후 분할 통치되던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다. 이렇게 유치한 표현을 동원해도 좋을 정도로 <굿 저먼>에는 온갖 클리셰가 가득하다. 포스터부터 제작과정, 엔딩장면에 이르기까지 <굿 저먼>은 <카사블랑카>와 <제3의 사나이>를 쏙 빼닮았으며, 분위기에선 심지어 <독일영년>의 영향까지 느껴진다. 그 결과, 예술적 독창성은커녕 고전시대의 죽은 그림자를 되살리려는 헛된 손짓만 눈에 들어오는 게 사실이다. 현재 미국 작가주의의 최전선에 위치한 감독이 자신의 토양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작품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아이콘인 조지 클루니와 케이트 블란쳇, 토비 맥과이어의 고전적 매력을 발견하는 건 작지 않은 즐거움이고, 당시를 재현한 미술과 음악 또한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DVD에는 어떤 부록도 없다. 소더버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 말하고 싶었던 모든 걸 영화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2006 선댄스가 박수친 영화
<달콤한 열여섯> Quinceanera
토마스 할아버지 집에 먼저 들어간 건 카를로스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마약과 도둑질도 모자라 게이 성향마저 보이는 아들을 내쫓아버렸다. 카를로스의 사촌 막달레나도 할아버지 집을 찾는다. 동정녀 임신을 주장하던 소녀는 완고한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왔던 것이다. 어여쁜 성인식을 꿈꾸다 성장통을 겪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인 <달콤한 열여섯>은 세 사람이 구성한 아주 작은 공동체의 이야기로 변한다. 어릴 때 자살을 기도한 염세주의자였지만 결국엔 생명과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고 떠난 할아버지처럼, 소년과 소녀는 스스로 삶의 답을 구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들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착하되 심각하지 않은 두 주인공이 사랑스러운 가운데, 두 감독은 LA의 에코 파크 지역에 거주하는 멕시칸들의 생활을 간간이 삽입하고, 백인의 편협함을 살짝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달콤한 열여섯>은 자칫 민감한 방향으로 빠질 수 있는 성장영화와 퀴어영화를 소박하고 담백하게 풀어나간 좋은 예다. 퀴어 진영의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는 리처드 글레이저와 워시 웨스트모어랜드는 두 번째 공동연출작 <달콤한 열여섯>으로 선댄스영화제의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DVD 부록인 ‘메이킹 필름’(21분)과 ‘영화제 참가 영상’(2분)에서 두 감독은 에코 파크에 살며 경험한 사실이 영화를 만든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커티스 핸슨의 할리우드판 <타짜>
<럭키 유> Lucky You
<럭키 유>는 포커판의 승부와 두 연인의 로맨스와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을 섞어놓은 드라마다. 헉은 도박이 직업인 남자다. 쉬 흥분하는 탓에 포커판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진정한 사랑도 만나지 못한 그는 게임과 사랑을 놓고 시험대에 오른다. 포커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라스베이거스는 단지 아름다운 밤의 도시일 뿐이다. 그런 도시에서 벌어지는 영화가 도박꾼과 일반인 모두에게 흥미롭기 위해서는 현실감과 재미를 둘 다 잡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커티스 핸슨의 신작 <럭키 유>에는 <LA 컨퍼덴셜>과 <원더 보이즈>만큼의 마법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기자를 노련하게 다루면서 수준 이상의 작품을 완성해내는 연출력은 여전하다. 핸슨의 영화가 점점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점도 마음에 든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각본가 에릭 로스와 핸슨의 공동 각본이 훌륭하거니와 데이비드 린치와 뛰어난 호흡을 맞췄던 피터 데밍의 카메라가 밤의 라스베이거스를 아름답게 조명한다. DVD는 부록으로, 영화에 출연한 실제 도박꾼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는 ‘포커판의 선수들’(18분), 포커 세계의 일대 변혁을 가져온 2003년 월드 시리즈를 배경으로 영화가 제작된 과정을 기록한 ‘제작 뒷이야기’(15분), 5개의 삭제장면(9분)을 제공한다. 참,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다음에 나오는 재미있는 영상도 놓치지 않기를.
사랑의, 인생의 해피 엔딩을 위한 돈 루스의 충고
<해피 엔딩> Happy Endings
돈 루스의 맛깔나고 따스한 각본들과 멋진 데뷔작 <섹스의 반대말>을 좋아했던 사람은 그가 근래 활발한 행보를 보이지 않아 아쉬웠을 터다. 루스가 <바운스>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해피 엔딩>은 십대 시절에 관계를 가졌던 이복남매와 그들의 주변에 위치한 여러 사람의 엇갈린 운명을 담은 작품이다. 이런 유의 영화는 인물들의 앙상블이 중요한데, 영화는 어찌된 일인지 분열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게다가 수시로 등장하는 해설용 자막과 화면 분할이 혼란을 가중시킨다. 로저 에버트는 <해피 엔딩>에 호감이 느껴지는 인물이 없다고 불평했다. 그렇지만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이 사랑스러울 수는 없는 법이다. <해피 엔딩>의 인물들은 상대방에게 충실하거나 진실하지 않으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상황은 종종 불편하다. 관계의 고통을 구태여 미화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유달리 거울장면이 많이 삽입된 <해피 엔딩>은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보라고, 그리고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할 때 행복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밉게 보이던 극중 인물들이 행복에 잠기는 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바로 빌리 조엘의 <Just The Way You Are>다. DVD는 감독, 촬영감독, 배우의 음성해설, 메이킹 필름(12분), NG장면(5분), 10개의 삭제장면(16분) 등의 다양한 부록을 수록했으나 아쉽게도 자막이 지원되지 않는다.
로데오의 전설 레인 프로스토의 전기
<8초의 승부> 8 Seconds
8초의 승부. 발광한 채 날뛰는 황소에 올라탄 채 승부를 가리는 시간을 일컫는다. 누군가에게는 찰나의 시간에 불과한 8초에 인생을 거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실존했던 로데오 경기의 전설적인 스타 레인 프로스토의 성장과 그가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사랑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았다. 존 아빌드센 감독은 <록키>를 통해 찡한 인간 승리 드라마로 관객을 사로잡은 전력이 있다. <8초의 승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휴먼드라마가 주는 감정의 폭발적인 힘은 없다. 8초란 시간은 레인 프로스토에게는 그 어떤 때보다 긴 시간이지만, 로데오에 익숙지 않은 관객에게는 어쩔 수 없는 짧은 시간인 탓이다. 그 대신 관찰자의 시선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 프로스토의 인생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특히 사랑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공감하는 바가 크다. <8초의 승부>는 다른 스포츠영화들에 비해 투박하다. 감동을 주고자 쥐어짜지도 않으며 특별히 드라마틱한 상황도 존재하지 않고,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영상의 힘도 부족하다. 하나 인간미가 느껴지는 소박함이 전달하는 감흥은 특별하다.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루되 과장되지 않은 현실적인 인물 묘사가 강점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아름다운 법이다.
엄지의 웃기는 패러디 쇼쇼쇼
<썸 시리즈> Thumb Series
영화 소재에 한계란 없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며 영화 팬들의 주먹을 끌었던 <썸 시리즈>. 이 영화는 늘 비슷한 스테레오 타입의 영화들에 물린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국과 재미를 준다. 손가락 연기의 경이적 세계를 보여주는 <썸 시리즈>는 국내의 인지도와는 달리 외국에선 상당한 인기를 끈 작품들이다. 국내 발매된 것은 <블레어썸> <썸타닉> <배트썸> <프랑켄썸> <갓썸> <썸워즈>, 여섯편이 있다. 제목에서 이미 이들 영화의 성격이 파악된다. 노골적인 패러디물이며 단지 사람의 특정 부위, 즉 엄지손가락에 눈과 코, 그리고 입을 붙여놓고 연기를 하고 떠드는 것이 다르다. 놀라운 수준의 엄지손가락 연기를 볼 수 있고, 초저예산이긴 하지만 <배트썸>은 꽤 정교한 세트와 촬영을 보여준다. 괴상망측한 손가락 연기와 유명 영화들의 명장면을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영화 <썸 시리즈>. 반드시 해당 영화의 오리지널을 먼저 감상하시길. <프랑켄썸>에서 묘사되는 괴물 탄생과정의 코믹버전이라든가 <갓썸>에서 침대 위에 놓인 말머리의 절단장면들이 기가 막히게 패러디된다. 그리고 DVD에 수록된 부가영상은 반드시 볼 것. 인간 배우를 능가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손가락 출연진들의 제멋대로 인터뷰를 즐겨보시길. 서로 자기가 잘났다는 식으로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면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각 3편씩 2개의 박스 세트로 국내 발매.
괴짜감독 케빈 스미스의 웃음 속사포
<제이 앤 사일런트 밥> Jay and Silent Bob Strike Back
<다이하드4.0>에서 뉴저지 해커로 잠깐 등장해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했던 케빈 스미스 감독을 기억하는가? 그가 왜 뉴저지 해커로 나왔으며 얼마나 웃긴 감독이며 배우인지 확인하려면 <제이 앤 사일런트 밥>을 놓칠 수 없다. 어빈 커시너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의 제목을 그대로 패러디하고 있는 영화는 <셰넌 도허티의 몰랫츠> <체이싱 아미> <도그마>로 이어지는 뉴저지 연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뉴저지에서 성장한 두 양아치 제이와 사일런트 밥이 벌이는 좌충우돌 해프닝과 화장실 유머, 그리고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극악의 패러디로 점철된 작품이다. 영화 시작 2분이 되면 욕설로 채워진 두 양아치의 랩이 선사하는 매력에 흠뻑 취한 채 영화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게 된다. 3분의 1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걸쭉한 대사의 재미에 꼽히고, 3분의 1은 스타 감독, 배우들의 카메오 출연에 즐겁다. 그 나머지의 재미는 패러디가 책임진다. 맷 데이먼에서 구스 반 산트 감독, 캐리 피셔와 마크 해밀 등이 케빈 스미스를 위해 선뜻 출연했고, 특히 마크 해밀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망가진 채 <스타워즈> 패러디를 하는 장면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너무 유쾌해 정신없이 웃다가 끝나는 영화에 못잖게 부가영상으로 수록된 제작과정과 인터뷰, 그리고 삭제장면들이 주는 재미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본편과 부록의 완벽한 균형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아르헨티나~알래스카, 긴수염고래 떼를 따라
<고래> Whales: An Unforgettable Journey
잘 만든 다큐멘터리는 걸작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진한 감동과 여운이 있다. 아이맥스용으로 제작된 <고래>는 국내 발매된 자연다큐멘터리 DVD 타이틀 가운데 단연 정상급이다. 1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을 위해 영화 제작자와 환경보호론자, 교육자, 그리고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제작팀이 꾸려졌고, 그들과 최신 기술의 만남이 탄생시킨 경이로운 자연의 세계가 <고래>다. 무분별한 포획과 환경 파괴로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들은 어떤 존재이며,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평소 가지고 있는 고래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아르헨티나 남부 해안지역 발데즈 반도에 모여 있는 긴수염고래 떼를 쫓아서 알래스카에 이르는 긴 여정에 동참한 제작팀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생동감 넘치는 고래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냈다. 자연다큐멘터리의 특성상 환경보호에 관한 주입식 해설은 여전하지만, 이 작품의 강점은 당연히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일깨워주는 데 있다. 그만큼 <고래>가 보여주고 있는 영상의 힘이 강하다. 아이맥스로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한다. 더불어 부가영상으로 수록된 메이킹 필름은 필견이다. 험난한 자연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80년대 수작업 판타지의 진수
<다크 크리스탈> Dark Crystal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의 등장으로 판타지영화들은 거대한 블록버스터영화로 성장했지만, 과거의 판타지영화들은 전혀 달랐다.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는 장르와는 거리가 먼 탓에 우선 거대한 스케일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 대신 아기자기한 재미와 볼거리, 그리고 초현실적 미술과 세트가 주는 시각적 성찬, 기괴한 캐릭터가 주는 매력이 유난히 강렬했다. 인형극의 대가 짐 헨슨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다크 크리스탈>은 80년대의 중요한 판타지영화이자, 짐 헨슨과 프랭크 오즈의 공동작업이 만들어낸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다크 크리스탈>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살아남은 종족의 마지막 후예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수정조각을 찾아 떠나는 모험 이야기로, 환상적인 미술과 세트 디자인이 긴 여운을 남긴다. 영국의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브라이언 프라이드의 회화를 바탕으로 구축된 <다크 크리스탈>의 세계는, 요즘 CG로 점철된 판타지영화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수작업만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짐 헨슨의 또 다른 영화 <라비린스>의 코믹함과는 달리 어둡고 진지함을 일관되게 유지한 <다크 크리스탈>은 정교한 애니매트로닉스 기술을 효율적으로 이용해 사실적 판타지를 구현, 장르 팬들을 매료시켰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반드시 큰 화면으로 봐야 할 판타지영화의 진수다. 국내 DVD 발매는 컬렉터 에디션으로 소장 가치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