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에 찾아온 아스라한 남자충동
<로맨스 킬러> 강도하 지음/ 애니북스 펴냄
<위대한 캣츠비> 강도하의 인터넷 만화를 책으로 엮었다. 인터넷에서의 올컬러를 살려, 스크롤하며 볼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 있게 편집했다. 이번의 주인공은 불혹의 나이 40을 앞둔 전직 킬러. 이야기의 시작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킬러인 주인공에게는 세 가지 룰이 있다. 첫째, 질문하지 마라. 둘째, 생각하지 마라. 셋째, 사랑하지 마라. 스스로 청소부를 자처하는 그는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과의 어떠한 교감도 거부한다. 하지만 프리지아 냄새가 풍기는 방에서 남편이 의뢰한 청부살인업자의 총에 죽을 운명인 여자는 그에게 자꾸 질문을 한다. 여자는 꽃 알레르기 때문에 총을 놓친 킬러의 총을 빼앗고, 그의 아내가 된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현재. 성형중독인 아내에게는 이미 아무 관심도 없다. 아내가 어머니로 보일 때도 있다. 전직 킬러는 딸이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데, 엉뚱하게 그 자신도 원조교제로 보일 수 있는 관계에 휘말린다.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여자의 아빠인 남자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남자를 죽일 수 있을까. 그 남자란 어떤 존재일까. 그의 총구가 마지막으로 향하는 대상은 누구일까. 강도하는 이번에도 그 자신도 잘 모르는 이유로 불안하게 떨리는 남자의 심리를 반전이 있는 이야기에 녹여낸다. <로맨스 킬러>는 <위대한 캣츠비>에 이은 강도하의 청춘 3부작 두 번째 작품. 2권 말미에는 강도하 인터뷰가 실려 있다.
4차원 허무개그의 진수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우스타 교스케 지음/ 대원씨아이 펴냄
대학도 취직도 포기하고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린 고교 3학년 사케토메 키요히코와 그를 피리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정체불명의 피리리스트 재규어의 이야기. <멋지다 마사루>를 쓰고 그린 우스타 교스케의 허무개그의 절정판이다. 피리리스트의 외길을 걸어가는 재규어는 기타리스트를 꿈꾸는 사케토메를 ‘피요히코’라고 부르며 집요하게 피리로 전향할 것을 권한다. 사케토메는 그런 재규어에게서 도망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애쓸수록 더욱 깊은 피리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에서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어처구니없는 설명방식. 절규하는 피요히코의 위에 떠 있는 말풍선에 적힌 “피요히코는 울었다… 말 그대로 살이 빠질 정도로 울었다”라는 말은 동정심보다 폭소를 유발한다. 하지만 웃음의 행간에는 청춘을 바라보는 촌철살인의 대사와 젊음에 대한 예민한 시선이 살아 있다.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를 읽기 전에 주의할 점은, 절대 논리를 내세워 작품을 재단하지 말 것. 어쩌다 재규어와 함께 살게 된 사케토메는 해야 할 집안 일을 적어 통 안에 넣고 뽑기를 해 각자 할 일을 정하기로 한다. 사케토메는 재규어가 쓴 것들을 뽑는데, 그 내용은 이런 식이다. “목욕 싫어, 화장실 축제, 쓰레기 번민, 세탁가면, 밥 왕.” 쓰레기 번민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버리고 싶다… 하지만 버릴 수 없어. 사실은 지금이라도 끌어안고 싶어”라는 말도 안 되는 재규어의 대답이 돌아온다. 엉성한 듯한 그림체와 어울리는 코믹한 이야기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잘 살아날지 미지수라는 점이 문제. 재규어 역의 가나메 준은 드라마 <비밀의 화원> <탐정학원 Q>에 출연하며 코미디와 드라마 모두에 재능을 보이는 배우다.
민트향 연애백서
<크래커> 토마 지음/ 애니북스 펴냄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연식은 잘 안 나가는 밴드의 매니저인 무진과 동거 중이다. 하지만 대학 동창인 둘의 동거는 문자 그대로 같이 사는 것뿐으로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연인 사이로 오해하기 때문에 가끔 부담스럽긴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한다. 연식은 가끔 연인으로서의 무진이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무진은 빠르게도 여자친구를 만들어 데이트를 시작한다. 무진의 여자친구도 연식의 존재를 알고 오히려 그들의 집에 편하게 놀러오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진의 여자친구가 이별을 고하고, 무진은 그 원인이 자신과 연식의 동거에 있음을 알게 된다. <크래커>는 생활의 편의를 위해, 영영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던 이성친구와 동거를 하게 된 연식과 무진을 통해 사랑과 우정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그려 보인다. 과연 이성친구란 가능한 것일까.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크래커>는 대단한 사건 사고 없이 연식과 무진의 일상을 한컷 한컷 그려내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감정이 점차 우정에서 사랑으로 기울어가는 모습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투닥대던 남녀가 결국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스크루볼코미디의 공식을 깨닫지 못하는 건 당사자들뿐. 연식에 대한 무진의 마음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무진의 여자친구라는 역설은 세 남녀 그 누구도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공감을 낳는다. ‘헤어진 남자친구와 친구하기’를 그린 <남자친9>의 작가 TOMA의 장기가 잘 살아 있는 만화. 아이필름에서 영화화하는 <크래커>는 <싱글즈>를 연상할 수 있는 로맨틱 멜로로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강풀이 부르는 광주를 위한 만가
<26년> 강도영 지음/ 문학세계사 펴냄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날 이후 태어난 젊은이들은 다시 물어올지 모른다. 그걸 안다고 하여 무슨 의미가 있는지. 광주항쟁 26주년이 되던 2006년에 연재된 <26년>은 그 반문을 향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80년도, 5월도 아닌, 26년이기에. <26년>은 몇몇 사람들이 과거형으로 묻어버리고 싶어하는 광주항쟁을 26년이 지난 현재로 불러내는 만화다. 그 현재가 너무도 생생하여 바로 지금 떨어지는 눈물이 아직 따뜻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재벌 회장 김갑세는 26년 전 광주에서 공수부대로 복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해 5월 광주에서 김갑세는 어린아이를 두고 총에 맞은 여인을 보았고, 무방비 상태로 죽어가는 시민군을 총으로 쏘았고, 바로 곁에 있던 동료가 학살에 휩쓸려 미쳐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제 죽음을 앞둔 그는 시민군과 공수부대 모두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그는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의 자식들을 모아 치밀한 암살 계획을 세운다.
<26년>은 강도영의 전작 <아파트> <순정만화> 등이 대체로 그러했던 것처럼 다중시점을 취하고 있다. 김갑세와 암살단은 모두 자기 시선과 기억으로 광주를 회상하고 그날 이후 감내해야만 했던 세월을 들려준다.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어머니, 살해당한 아내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화인으로 새겨진 살인의 기억이 온전한 1인칭 시점을 타고 파도처럼 몰려온다. 보기 드물게 탄탄한 스릴러의 구조는 다음 문제다. <26년>은 어찌하여 역사가 끝나지 않는지, 끝날 수 없는지를,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공동연출한 1973년생 젊은 감독 이해영이 영화로 만들 예정.
케이크 프린스들의 매력이 철철
<서양골동양과자점> 요시나가 후미 지음/ 장수연 옮김/ 서울문화사 펴냄
새벽까지 문을 여는 ‘앤티크’는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들르고 싶어지는 케이크 가게다. 사장은 먹어보지도 않은 케이크의 맛을 절창으로 읊어내리고, 프랑스 호텔에서도 스카우트하려고 하는 파티셰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는 계절 한정 메뉴를 만들고, 물잔마저 수십만엔을 호가하는 고급 앤티크 제품이다. 무엇보다도 이 가게에서 일하는 남자 네명이 모두 그림 같은 미남자인 것이다. 게다가 한명은 바보다! <커피프린스 1호점>보다도 아름다운 가게가 아닐까 싶다.
네권짜리 단출한 만화 <서양골동양과자점>은 케이크 가게 앤티크에서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수재에 재벌가 도련님인 타치바나는 합격한 고시도 때려치우고 외할아버지 회사도 그만둔 다음 엉뚱하게도 케이크 가게를 차린다. 그가 모셔온 최고의 파티셰는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토할 것 같다”며 차버린 게이 오노. 그사이 만나는 남자마다 빠져드는 ‘마성의 게이’로 변신한 오노는 시력 때문에 권투를 그만둔 천재 복서 칸다와 머리가 나쁘지만 성실하고 잘생긴 타치바나네 가정부의 아들 치카게와 함께 앤티크를 꾸려나간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의 매력은 매우 사소하다. 어린 시절 유괴당했던 타치바나와 관련된 미스터리가 있지만, 그보다는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듯한, 케이크와도 같은 한순간이 페이지마다 깃들었기에, 책장을 넘기는 손길을 멈출 수가 없다. 평생 모범생으로 살았던 중년 남자가 남몰래 케이크를 맛보며 미소를 머금는 한때처럼. 그런 맛을 느낄 수 있다면 “꿀럭하고 하나같이 달기만 한” 케이크의 맛을 모르더라도 앤티크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민규동 감독이 이 네 남자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다.
핏빛 관 속에서 안식을 구하라
<프리스트> 형민우 지음/ 대원씨아이 펴냄
고대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신부 이반은 봉인에서 풀려난 악마 테모자레에게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연인 제나를 잃는다. 시체로 되살아난 제나의 목을 자른 이반은 영혼의 절반을 악마에게 팔아 테모자레와 대면하고자 한다. 이반을 지배하는 악마는 오래전 테모자레와 대결했던 이단 심판관 베시엘. 자신을 신으로부터 등돌리게 만든 테모자레에게 복수하기 위해 영혼마저 포기했던 베시엘은 이반의 육체에 동거하며 그의 분노를 추동하여 테모자레와 그를 모시는 11사도가 형성한 ‘안식의 원’ 안으로 다가간다.
할리우드에 판권이 팔려 화제를 부른 <프리스트>는 여러모로 한국에서는 낯선 만화다. 미국 만화처럼 직선으로 이루어진 길고 가늘고 강인한 그림체, 성경에 기반하여 신의 의미를 묻는 테마, 하나의 육체에 두 영혼이 깃들었다면 그 육체의 주인은 누구인지 묻는 끝없는 탐색, 분노와 사랑이 하나같이 인간과 천사와 악마 모두를 고행으로 몰아가는 아이러니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프리스트>는 숱한 질문으로 이루어진 만화다. 이반과 11사도와 테모자레를 사랑하여 추락한 천사 네트라핌과 정체도 모르는 적을 추적하는 연방보안관 코번 일행은 그들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물어야만 한다. 그들의 운명은 무엇인지, 그들은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렇다고 하여 <프리스트>가 지루한 것은 아니다. <이블 데드>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샘 레이미가 제작자로 나선 데서 알 수 있듯 <프리스트>는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액션과 잔인무도한 학살이 짧은 컷으로 분절된 액션영화처럼 긴박한 만화다. 단색으로 그려졌으나 핏물로 젖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