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길 위에 내몰린 한 사이 나쁜 부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근처의 모텔에 찾아가 날이 밝을 때까지 하룻밤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속도로를 일부러 벗어난다, 차를 낯선 사람의 손에 맡긴다, 고장난 차를 버리고 음산한 모텔에 들어간다. 이 사이 나쁜 부부가 심야에 행하는 선택들은 하는 족족 최악의 선택이 되고, 그 하룻밤은 그들에게 불가피한 최악의 밤이 된다. 어쩔 수 없이 낯선 모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야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푹신하고 에로틱한 침대가 아니라 폭력과 외설을 예감케 하는 시선들이다. 그들은 객실에 놓인 녹화 테이프를 본 뒤 자신들이 곧 스너프 필름의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탈출을 시도해보려 하지만 그들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고 있으며, 차도 없이 낯선 곳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지하철과 지하세계를 적극 활용한 전작 <컨트롤>로 한정된 공간 사용법을 보여준 님로드 앤탈 감독은, <베이컨시>에서도 음산한 모텔을 벗어나지 않는 제한된 공간 연출법을 선보인다. 심야에서 새벽까지의 짧은 시간에 벌어지는 이 부부의 탈출기는 방과 지하를 오가며 전개되고, 이들이 보이는 화면 너머에서 어떠한 외설적이고 잔혹한 일들이 연출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객은 다만 화면 너머로 들리는 비명과 비디오 화면으로 슬쩍슬쩍 보이는 녹화장면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스너프 필름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튀는 피없이 폐쇄적인 긴장을 만들어내는 노련한 솜씨는 일견 대견하지만, 단지 한밤의 요란한 소동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싱거운 결말은 가벼운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잠복하고 있다가 보란 듯이 놀라게 하는 반전도 없고, 복잡하게 뒤틀린 서사의 꼬임도 없는 정직한 연출의 성실함은 칭찬할 만하다기보다는 다소 맥빠지고 소박하다. 사이 나쁜 부부의 상황은 ‘왜 스너프 필름인가’에 대한 설득력을 전달하지 못하며, 스너프 필름이라는 위험한 소재가 담지하는 최소한도의 윤리적인 입장도 이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 잃은 매력적인 엄마 케이트 베킨세일의 우울증과 스너프 필름, 그리고 영웅을 닮아가려 하는 남편 등의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얽혀들었다면 더 매력적인 영화가 되었을 <베이컨시>는 그러나 복잡한 생각없이 긴장과 공포를 즐기는 관객에게는 문제없는 스릴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