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의 연애는 아무리 돌려 말해도 절망적이다(물론 영화 이야기다. 그는 올 봄 행복하게 결혼했다). 허진호의 남자들은 자신을 원하는 여자에게 가는 길에 깊은 함정이라도 파여 있는 양 망설이고 뒷걸음질친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는 사랑 이야기였다.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를 먼저 떠난 건 은수지만, 상우도 다시 찾아온 은수를 거절한다. <외출>의 인수는 서영을 향해 차를 몰지만 어쨌든 관객이 보는 동안 주인공 남녀는 결합하지 못한다. 혹시 여기에는 사랑의 성사를 꺼리는 마음이나 사랑을 향한 복수심이 있는 게 아닐까. 넘겨짚는 질문을 받은 허진호 감독은 너털웃음으로 응대한다. “그럼 복수 연작인가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사랑의 가능성을, <봄날은 간다>가 젊은 날의 사랑을, <외출>이 기혼자의 두 번째 사랑을 그렸다면 허진호 감독의 네 번째 장편 <행복>은 사랑의 회한에 관한 영화다. 그의 다음 기획은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의 영화화다.
-돌아보니 1998년 1월에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를 제외하면 <행복>까지 세 작품이 모두 가을 개봉이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남다른 감회가 있겠다. =내가 가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혹시 그래서인가. (웃음) 계절의 흐름을 드러내는 영화를 하다보니 촬영 시기, 개봉 시점이 비슷해진 것 같다. 그동안 터득한 요령도 있다. 예를 들어, 7월에 크랭크인하면 평균 9월 중순에 끝나니 계절의 흐름을 담기 힘들다. 9월쯤 시작하면 남아 있는 여름 기운도 찍을 수 있고 끝무렵인 11월에는 겨울 분위기도 잡을 수 있다. 여름이나 겨울의 끝자락에 시작하는 편이 좋다.
-<행복>은 <외출>보다 먼저 기획됐다. 제작이 지연되면서 영화에 변화가 있었나. =<외출>을 먼저 하기로 결심하기 전 약 1년간 헌팅, 자료조사 등 상당한 준비를 했다. <외출>을 마치고 나서는 내가 왜 <행복>을 하려고 했는지 자문하는 시간이 있었고 지난해 봄에 재착수했다. <행복>은 예전 영화와 달리, 아이디어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낸 게 아니라,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경우다. 그래서 시간이 지났다고 달라진 점은 별로 없다.
-영수와 은희 역할을 황정민, 임수정씨가 맡은 뒤 일어난 인물의 변화는 없나. = 황정민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 전작의 남자들과 다른 성격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아마 더 활발한 인물의 성향을 의미한 것 같다. 나 역시 달리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물론 그래서 불편한 순간도 있었지만 찍으면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했다. 임수정씨는, 배우가 인물을 바꿔놓았다는 차원과는 조금 다르다. 은희라는 인물에겐 어떤 완전성이 있다. 완전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고 다 던질 수 있는 캐릭터다. 그런데 이런 인물은 자칫 거짓말처럼 보이거나 재미없을 수 있어서 시나리오 단계부터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임수정씨가 들어오자 은희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로서 납득이 됐다. 정해진 상황에 들어가 연기하는 게 아니라 작은 연기들로 그 상황을 만든 거다. 그래서 “원래 성격이 은희 같니?”라고 물었더니, “아뇨, 저는 수연이(영수의 전 애인) 같아요”라더라. (웃음) 영화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 배우 같다. <행복> 촬영 중에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후시녹음을 했는데 박찬욱 감독이 힘들었다고 하더라. 은희의 상태로 가라앉아 있어서….
-<행복>은 중한 병을 앓는 두 남녀가 요양소에서 만나 짧은 사랑을 하는 이야기다. 주인공들이 건강하지 않고 아픈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픈 사람들이 요양소에서 만나 빈집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몸도 쇠약하고 가진 것이 없고 힘든 사람 둘이서 외딴 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행복해 보여서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할 때 나이, 재산, 외모 같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사소한 부분이 크게 작용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소유한 상태라서 그런 결핍을 상대에게서 보는 게 아닐까. 만약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러다 둘 중 한 사람의 병이 낫는다면?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이 우연히도 사랑이었지만, <행복>의 은희처럼 평생 병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라면, 사랑을 포함해 본 모든 면에서 뭔가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는 일이 쉽지 않을 거다. 그래서 더욱 영수에게 애착한 게 아닐까 싶다. 사랑을 병과 유비 관계로 놓은 점도 인상적이다. =몇 가지 생각이 있긴 했다. 영화를 만들 때 ‘주제’를 못박지는 않지만 머릿속에 몇개의 정리된 문장이 있다. <행복>은 전작보다 그 문장의 수가 좀 많았다. 한 사람은 병이 낫고 한 사람은 낫지 않는다. 한 사람은 즐겁게 살고 싶어하는 도시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런 세계를 모른다. 한 사람은 대상을 완전하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불완전하게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처럼 몇몇 대립항을 만들었다.
-그런 결정적인 ‘문장’에 포함되는 극중 인물의 대사가 있다면. =시골에서 은희와 사는 영수를 찾아온 수연이 다 좋냐고 묻자 영수가 좋다고 말한다. 그러자 수연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라고 한다. 사실 결혼 뒤 내가 받는 질문이기도 한데 나 역시 “세상에 다 좋은 게 어딨어. 좋으려고 노력하는 거지”라고 답한다. 그러나 은희는 “난 다 좋아”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말뿐 아니라 정말 다 좋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뽀뽀하고 있는데 왜 뽀뽀가 하고 싶지?”라는 대사가 대변한다.
-<행복>의 이야기에 대해 “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 같다”는 감상도 있다. 한 후배기자는 농담 삼아 ‘호스피스 영화’라고 하더라. (웃음) 병을 드라마의 조건으로 끌어들일 때 위험성도 연출부와 토론했을 것 같다. <외출>과 <행복>은 줄거리만 추려놓고 보면 매우 통속적이다. 통속적인 이야기를 다르게 보여주고 싶은 야심이 있는 듯하다. =야심은 없다. 그냥 통속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나 역시 무슨 이야기냐는 질문을 받을 때 호스티스 영화 같다는 말을 한다. (웃음) 고시공부 시켜놨더니 합격하고 나서 여자를 등진다는 식의 이야기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군산이 전체적 배경이지만, 나머지 세편은 주인공이 서울 밖으로 떠나서야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 일상과 노동의 공간에서는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거나 서울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 아닌지. (웃음) =무의식중에 뭐가 있을진 몰라도 그런 편견은 없다. 박광수 감독 연출부 시절부터 지방에서 촬영하는 것을 좋아하게 됐다. 서울에서 영화 찍는 일은 너무 불편하다. 영화를 찍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출퇴근하는 방식의 작업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상상이 안 간다.
-<행복>에는 블랙아웃(암전) 장면 전환이 몇번 나온다. 어떤 용도로 썼나. =이 영화의 블랙아웃은 시간의 흐름을 표시할 뿐 미학적인 다른 의도가 들어 있지 않다. 블랙아웃을 적극적으로 못 쓰는 편이다. 좀더 간단하게는 ‘1년 후’ 같은 자막, 오버랩도 있지만 그런 기교도 나는 쉽게 못 쓰겠다. 믹싱 기사에 의하면 평균적 영화에 비해 음악 볼륨도 자꾸 낮추려 한다고 한다. 음악이 들어가서 놓치는 디테일도 있지만 음악이 들어가서 감정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선택이 쉽지 않다. 다음 영화에서는 조금 적극적으로 써볼까 싶다.
-<행복>이 개봉하고 나면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멜로드라마에 비유 혹은 비교하는 말들이 나올 것 같다.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아마 <부운>과 네편 정도를 보았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외출>을 본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이 나루세 미키오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다. 감정의 잔인함이 비슷하다고 하더라.
-일부 남성 캐릭터의 공통점이 있긴 하다. 여성의 사랑하는 능력을 동경하고 그녀들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그러나 나는 그 세계에 함께할 수 없다”라고 자학하며 돌아선다. =정말 <부운>은 그랬다. 하지만 엄밀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들은 분명히 선택을 한 거다. 예를 들어 <행복>의 영수에게 그런 순간이 몇번 있다. 어렵게 술·담배를 끊어놓고, 트럭 운전수가 술을 권하니까 받아마신다. 내내 마시고 싶어 안달한 것도 아니면서 순간적으로 쌓아올린 걸 무너뜨려버리는 거다. 예전 여자친구 수연의 집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털고 일어날 수도 있는데 일어나지 않는다. 이튿날에도 짐을 다 싸놓고 양말을 한쪽만 신고 있다.
-현장의 변수가 많아 촬영이 더딘 편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행복>은 딱 석달 만에 촬영이 끝나서 작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 노조와 협약에 의해 제작환경이 크게 달라질 텐데 새로운 시간 운용 방도가 있나. =환경이 허용하는 대로 할 수밖에. (웃음) 현장에서 생각하는 시간과 컷당 테이크 수를 줄였다. 콘티도 전작보다 많이 준비했지만 컷 수가 적은 스타일이기 때문에 큰 영향은 없다. 날씨도 많이 도왔다. 영화를 주어진 예산과 기간 안에 찍는 것은 중요한 약속이다. 다만 너무 기계적으로 찍어내게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 경우는 현장에서 상황과 대사를 끌어내는 부분을 줄이거나 스타일을 바꿔서 고정된 콘티를 갖고 가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다. 아니면 현장성을 살려가되 테이크 수를 비롯한 다른 부분을 줄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