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10회. “한번만, 딱 한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너 좋아해.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젠 상관 안 해. 정리하는 것도 힘들어서 못해먹겠으니까, 가보자 갈 데까지…. 한번 가보자.” <커피프린스 1호점> 10회 방영분이 끝나고 가슴을 부여잡지 않은 (여자) 시청자가 있었을까. 여자임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은찬(윤은혜)과 투닥대는 인연으로 시작해 그를 귀여워하고 예뻐하고 좋아하고 사랑한 한결. 소박하고 꾸밈없는 은찬 앞에 짓궂다가 다정했다가 약해지고 강해지기도 했던 한결의 모습들은 이전까지 대중이 잘 몰랐던 공유의 얼굴들을 한꺼번에 숨막히게 펼쳐 보였다. 비오는 주말 오후 <씨네21> 스튜디오에서 만난 공유는 바로 그 한결을 요약한 슬라이드 쇼 같았다. “제가 좀 촌스러워서 이런 걸 잘 못해요.” 막 종영한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촬영 세트 안에서 장난감들과 커피메이커와 어우러지는 걸 쑥스러워하는 공유는 은찬 앞에 어쩔 줄 모르는 한결 같고, 큰 백곰인형을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다 “내가 가식적으로 보이지 응?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지?”라며 스타일리스트에게 짓궂게 질문 던지는 공유는 괜히 은찬에게 심술 부리는 한결 같다. 젠틀한 인사 위에도, ‘예쁜 척’을 불편해하는 남자다움 위에도 일일이 한결이 겹친다.
그러나 공유는 한결의 행복한 미소를 애써 자제하려는 듯 보였다. 드라마 종영일에 열린 1천명 규모의 팬미팅 이벤트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말한다. “제가 좋은 건 시청률이 잘 나와서도 아니고 연일 기사에 오르락내리락해서도 아니에요. 우리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 나오고 밖에서 난리가 났다라는 말들은 사실 안 들으려고 무의식중에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고요, 처음부터 나를 믿고 지지해줬고 나한테 ‘공유는 좋은 배우’라고 해줬던 사람들에게 뭔가 보답이 된 것 같아서 그게 너무 흐뭇했어요. 중간에 제가 얼마든지 좌절하거나 혹은 어린 마음에 극단적으로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그러지 않고 열심히 했다는 것에 대한 나 스스로의 대견함과 뿌듯함이 있었고.” 공유는 인터뷰에 응하는 태도를 한번도 흩트리지 않았고 모든 대답에 정확·공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침착하고 풍부한 설명, 감성적이면서도 이성적인 목소리로 인터뷰에 필요한 적정온도를 유지했다. 그것은 데뷔 6년째 최고치로 치솟은 대중의 열광에 데이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고, 그의 타고난 성격이기도 했다. 어딘가 짓궂은 외모의 배우 공유는 최한결보다도 이상적인 남자의 얼굴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어느 인터뷰를 보니 처음 이 드라마를 선택할 때 “최근에 트렌디 드라마가 대박을 낸 경우가 없어서 큰 기대를 안 했다”는 대답이 있었다. =트렌디 드라마라는 장르 자체를 개인적으로 신뢰하진 않았다. 항상 뻔할 뻔자의 드라마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주인공 네 남녀의 사각관계가 얽히고설키다가 해피엔딩이 되고, 한쪽은 비극이 되고. 그런 점을 걱정했던 거다. 1, 2부 대본을 받았을 때도 그랬고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도 그랬고, 그런 뻔한 트렌디 드라마, 뻔한 캐릭터라고 할 여지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이걸 할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우려에도 선택을 했다. 매니지먼트사 의견이 더 컸나, 본인의 의지가 더 컸나. =매니지먼트사 의견이 나보다 좀더 긍정적이긴 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원래 생각이 좀 많은 놈이고,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처음으로, 데뷔 6년이 되면서 배우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앞으로 배우로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이 가장 많은 시기였다. 감독님(이윤정 PD)의 전작을 찾아보고 나서 감독님에 대해 반 이상의 믿음이 생긴 것 같다. <태릉선수촌>을 4부까지 한번도 안 쉬고 재미있는 책을 넘기듯 술술 봤다. 이런 분이라면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불식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결정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또 모르지 않나. <커피프린스 1호점>은 16부의 호흡이 긴 미니시리즈이고, 감독님은 미니시리즈 입봉작이신 분이고. 그것에 대한 불안함은 또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란 배우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을 거다. (드라마 다 끝나고) 나중에 인터뷰하신 거 보니까 그렇더라. (웃음)
-6년 만에 처음으로 본인의 일에 회의를 느꼈다고 했는데, 왜 6년 만인가. 더 일찍 겪을 수도 있었고, 좀더 유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지금이었나. =나 스스로도 그걸 정리하고 있는 중인데, 어릴 때부터의 꿈이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기센 사람들, 이 말 많은 동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려면 나 스스로 당당해야겠다는 생각을 데뷔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다. 24살 데뷔라는 건 사실 또래 배우들에 비하면 굉장히 늦은 편이지만 절대 기죽지 말고 자신감이 있다면 어느 누구도 날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나를 무시해도 그것이 나를 흔들지 않을 것이다라는 다짐을 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쨌든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힘들다고, 일이 재미가 없다라는 얘기를 처음 한 게 스물아홉살이었다. 말을 내뱉을 정도라면 내가 어떤 마음의 준비도 끝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주변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
-이윤정 PD는 본인의 어떤 점들을 들어 한결 역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표했나. =그분은 정답을 안 준다. 상대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물어본다. 이건 뭘까요? 자신은 답을 알고 있지만 그 답을 내가 스스로 깨우쳐서 하게끔 유도한다. 건방지게 말하자면, 굉장히 좋은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귀찮기도 했다. (웃음) 내가 게을러진 적도 있고. 나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고 수동적인 사람인데,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것들을 결국은 다 끄집어내니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누가 알아주나 이걸? 하고 툴툴거린 적도 있다 사실. 근데 찍고 난 뒤에 보면 그때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 그리고 속으로 귀찮아했던 것들이 창피하더라. 그 부분이 제일 고맙다.
-한결과 은찬의 호흡이 좋았다. 특히 한결이 은찬을 데리고 장난치는 장면들이 좋았는데, 13회에선가, 한결이가 은찬이와 걷다가 길가의 사람들한테 “얘 여자예요” 하고 은찬의 뒤통수를 쳐서 인사시키고 하는 것들. =그건 애드리브다.
-시나리오에는 뭐라고 쓰여져 있었나. =둘만의 데이트라고 써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이 같이 만들었나. =그건 은찬이도 몰랐다.
-그럼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 이 얘기만 하고 리드한 건지. =그렇게 얘기할 때도 있었고, 얘기조차 없이 서프라이즈처럼 해서 상대방의 리액션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감독님의 리액션을 보는 재미도 있고. 감독님은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바로 얘기하신다. 근데 그때 그 장면은 웃으셨다. 그럴 법하다고. 그리고 은찬이가 그걸 받아줄 능력이 된다. 윤은혜란 친구가 연기를 딱딱하게 하는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옆에서 말 안 하고 있다가 내가 뭘 해도 그걸 다 받는다.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짓궂다. 근데 딱, 정말 밉지 않을 정도까지만. 그래서 얄밉단 소리를 많이 듣는다. (웃음)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영화 데뷔한 뒤 <잠복근무> <그녀를 모르면 간첩> <S다이어리>, 드라마 <어느 멋진 날> <건빵선생과 별사탕> 등의 작품을 했다.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왔나. 당연히 일관된 기준도 있었을 것이고 시기적으로 작용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같이 일하는 파트너간의 예의도 필요하고. (웃음) 근데 그건 나뿐 아니라 어떤 배우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고 그 안에서 최선을 찾아내느냐의 문제인데, 나름 매번 최선책을 찾았다고 생각했으니까 결정하고 했을 거다. 근데 지나보면 나도 정리가 되지 않나. 분명한 건 있다. 모든 작품이 맘에 들진 않는다 절대적으로. 어떤 작품은 내가 정말 마음을 주지 못했구나, 하는 게 있다. 그런 건 사실 내가 못난 거고 나를 탓해야 한다. 그게 차라리 속이 편하다. 그래서 점점 작품 고르는 데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23살에 VJ로 데뷔했다. 그전까지는 뭘 생각하고 있었나. 데뷔 초 인터뷰 때, 광고회사에 들어가려 했단 얘기도 했는데. =중학생 때 꿈이 그랬다. 나 공부 한창 잘할 때. (웃음) 고등학교 가면서 성적이 죽죽 떨어지고, 난 뭐 먹고살지 싶었다. 그래서 배우를 한 건 아니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영화과를 가게 된 이유를 합리화하자면, 연출 분야가 있으니까, 꼭 감독이 되겠다고 맘먹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광고나 그 계통의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내가 배우가 될 생각이 없었다. 연기하러 가는 게 아니라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경희대 연영과가 실기보다 수능시험 비중이 높았다. 실기는 한달 반인가 연습해서 흉내만 내고 들어갔다. 내가 끼가 넘쳤던 것도 아니고, 그때 받은 점수로 갈 만한 학교였다.
-본인이 하고 싶은 역할과 사람들이 본인에게 원하는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너무 많이 달랐다. 그래서 힘들었고, 이 드라마 하기 전에도 고민을 했던 거다. 이번 작품을 하고 나서 변했다. 내가 불신하고 싫어해온 모든 것들이 중간에 소통자만 있으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무조건 ‘이건 이래서 안 돼’가 아니라 파트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이게 말을 잘못하면 이전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은 다 바보가 될 수 있는 건데(웃음), 분명 그들하고도 좋았지만 이번에 내가 더 물 만난 고기처럼 놀 수 있었던 데에는 감독님한테 공을 돌리고 싶다. 그게 맞고.
-이번 팬미팅 때, ‘스물아홉이 너무 싫어 빨리 서른이 되길 바랐다, 서른살의 여유를 찾고 싶었다’고 했는데, 찾을 수 있을 것 같나. =<커피프린스 1호점>을 찍는 동안에도 그랬고 끝난 지금도 나의 느낌은 정말 덤덤하다. 좀더 오버를 하자면, 지금의 과분한 사랑과 관심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나는 항상 그 자리에 있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돌변하는 주변의 반응을 보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드라마를 스물아홉에 만난 게 나한텐 잘된 일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20대 초·중반에 이 드라마를 만나서 지금과 같은 사랑을 받았다면 지금의 내가 형성이 안 됐을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이만큼 붕 떴다가 바보가 됐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줄 알았을 거다. 지금 나이에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나를 추스를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래도 애는 아니구나,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어느 정도 성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좋다. 이런 과정이 밑거름이 돼서 30대에는 좀더 견고하고 탄탄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