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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가면을 쓴 지성인들의 낙원
이다혜 2007-09-13

<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아르테 펴냄

학력 위조를 해서라도 똑똑해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달리, 어떻게든 지성을 숨기려는 한 여자가 있다. 54살의 못생긴 과부인 르네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고급 아파트에서 수위로 일한다. 르네는 학교는 가보지도 못했고 항상 가난하게 살아왔지만 사실 문화귀족이다. 그녀는 오즈 야스지로와 톨스토이를 사랑면서도 그 사실을 한번도 남에게 알린 적이 없다. 부유한 아파트 주민들에게 나이들고 못 배운, TV나 보는 관리인 여자라고 낙인찍힌 채 혼자만의 낙원을 즐기는 게 그녀의 낙이다. 겉보기엔 무감각한 듯하지만,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고슴도치처럼.

‘30주 연속 프랑스 전체 도서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는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지성을 숨긴 채 살아가는 아파트 관리인 르네와 그 아파트에 사는 열두살 소녀 팔로마의 이야기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진행된다. 두 사람은 꽤 흡사하다. 팔로마 역시 르네처럼 똑똑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즐긴다. 너무 똑똑한 나머지 삶을 다 살기도 전에 알아버렸다고 생각하고, 열세살이 되는 날 자살하기로 계획한다.

환경은 너무나 다르지만 내면은 쏙 빼닮은 르네와 팔로마가 처음부터 서로를 알아본 것은 아니다. 이들 주변에는 고상하고 잘난 척하는 속물투성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아닌 오로지 선입견에 따라 타인을 재단한다. 틀린 말을 지적하기보다는 의미없는 우아한 말을 주고받고, 정신상담을 받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평생토록 플로베르의 소설을 입에 담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의 삶에 균열이 생긴 계기는 뜻밖에도 새로 이사온 나이든 일본 남자 오즈 덕분이었다. 르네가 ‘실수로’ 입에 담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인용구를 오즈가 알아듣고 그녀의 지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즈는 또한 팔로마의 지성도 궤뚫어보고, ‘수상한 관리인’ 르네에 관한 호기심을 팔로마와 나눈다. 르네의 관리실은 이내 오즈와 팔로마, 르네의 은신처가 된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동양, 특히 일본의 문화를 바라보는 약간 호들갑스런 시선이 실소를 자아내는 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태도를 보이는 대목들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소피의 세계>처럼 소설의 즐거움과 사고하는 즐거움을 주는 이 책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 ‘이 세상 속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준다. 르네와 팔로마가 관심을 두는 철학, 예술, 심리학 등에 관한 이야기들은 읽기가 녹록지 않지만 철학 선생이었던 저자 뮈리엘 바르베리는 일견 무거울 수 있는 관념들이 소설적으로 유연하게 읽히도록 녹여내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