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 <피와 뼈>의 김준평, <내일의 죠>의 원작자 가지와라 잇기, <분노의 주먹>의 제이크 라모타, 왕우 같은 무뢰한들은 너무나 매혹적인 인물이다.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피투성이가 돼 스스로 자기무덤을 팠던 남자들. 정말 궁금하지 않은가?”(오승욱 감독이 홍콩 무협스타 왕우에 대해 썼던 글에서) <킬리만자로>(2000)로부터 무려 7년, 오승욱 감독은 <무뢰한>이라는 신작에 매달려 있다. 그동안 <씨네21>을 통해서도 알랭 들롱, 박노식 등 동서를 넘나드는 과거 누아르 액션영화의 향수어린 주인공들에 대한 맛깔스런 글을 썼던 그이기에 <무뢰한>이라는 제목이 주는 울림은 크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무뢰한은 오히려 냉혈한에 가깝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그런 폭력적 무뢰한이기보다는 남에게 기대지 않는 대신 남이 자신에게 기대는 것 또한 거부하는, 철저히 자기만의 룰로 살아가는 냉정한 남자다. <킬리만자로>의 해식(박신양)이 자기 운명과 함께 타들어가는 불덩이 같은 인물이었다면, <무뢰한>의 정재곤은 결코 흥분하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차가운 영혼을 가졌다. 오승욱 감독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나, 장 피에르 멜빌의 알랭 들롱 같은 고독한 영혼의 무뢰한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강력계 형사 정재곤은 박준길을 뒤쫓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때 박준길이 몸담았던 ‘새나라 컨설팅’이라는 ‘조직’ 역시 복수를 위해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박준길이 조직의 정부 김혜경과 눈이 맞은데다 돈까지 횡령하는 일이 있었고, 그 돈을 회수하려 보낸 킬러 황충남마저 싸늘한 시체가 돼 돌아왔던 것이다. 이에 새나라 컨설팅은 정재곤에게 나중에 박준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팔, 다리 중 하나를 쏴서 병신으로 만들어주면 거액의 수사진행비를 대겠다고 유혹한다. 그렇게 새나라 컨설팅을 스폰서 삼아 정재곤은 이혼한 옛 아내 한지윤의 대출이자를 갚는 데 쓴다. 이제 정재곤은 박준길이 분명 김혜경과 접선하고 있다는 생각에, 박준길의 옛 감방 친구인 이영준으로 위장하고 단란주점 마담인 김혜경에게 접근한다. 이후 그녀가 정재곤을 단란주점 영업부장으로 대동하며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과거 정재곤은 살인범의 새끼 애인을 잡아다 지금처럼 처절하게 이용한 기억이 있기에, 김혜경에게 묘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김혜경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박준길이 나타난다.
<무뢰한>은 ‘남자영화’라기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두 남녀의 진한 비극 멜로에 가까울 것 같다. 처음에는 서로 의심하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그들이 묘한 사랑의 감정에 빠져든다. 오승욱 감독은 “성장영화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무뢰한>은 그 누구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해본 적 없고, 그 사과하는 방법 또한 알지 못하는 한 남자가 한편으로 더 위악스러운 짓들을 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비극”이라 말한다. <무뢰한>은 결국 피도 눈물도 없는 한 남자가 사랑을 느껴가는 과정이다. “<킬리만자로>가 늘 어른스러운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데, <무뢰한>은 그보다 어른스러운 영화가 될 것 같다.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을 중요하게 담을 것 같은데, 그것을 통해 인물들의 어떤 도덕과 윤리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싶다”는 게 그의 욕심이다. <무뢰한>은 아마도 우리가 내년에 만나게 될 가장 하드보일드한 멜로영화가 될 것 같다.
Key Point: 2007년 서울의 지형도 그리기
<킬리만자로>에서 강원도 주문진의 황량한 바닷가 풍경을 통해 주인공들의 내면을 드러냈던 오승욱 감독은 <무뢰한>에서는 2007년 서울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주인공들의 감정을 담아내려 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부유층 동네에서 살다가 상황에 몰리게 되면서 서서히 변두리를 전전하게 되고, 마침내 인천으로까지 떠밀리게 된다. 오승욱 감독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주인공 엠마가 이사를 다니며 여러 욕망과 심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추락하는 이들의 내면을 서울이라는 도시의 생생한 풍경 속에서 보여주려는 것이다. “서울은 헌팅을 다닐 때마다 매번 변해 있을뿐더러 정말 답답하고 삭막한 도시다. 그걸 단지 카메라로 담는 게 아니라 인물들의 정서와 동화되게 담아내고 싶다.” 재개발 등으로 인한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데도, 그가 굳이 서울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헌팅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2007년 서울의 풍경을, 그러니까 지금 서울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싶다”는 다소 인류학적인 탐구정신 때문이다. 그는 “30년 뒤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몰락한 서울 사람이 어떤 곳을 거치게 되는지 차근차근 보여주려 한다”고 말한다. 서울 시내를 헌팅하는 제작진의 발걸음이 유독 바쁜 것도 도시의 변화속도보다 빨리 적절한 촬영지를 찾아내기 위함일 것이다.
제작 라이필름, M&FC 촬영 예정 2007년 겨울 개봉 예정 2008년 중 예상 제작비 30억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