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의 한국영화는 일견 중국의 ‘5세대’ 영화 만들기의 전성기를 연상시킨다. 중국의 새로운 감독들이 만들어낸 모든 영화가 그 나라의 상황에 대한 암호였던 1984년에서 1987년까지의 시기 말이다. 지금의 한국영화와 당시의 중국영화간의 비교가 아주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감독들(첸카이거, 티엔주앙주앙, 황지엔신, 장저밍 등등)은 작품 속에 시정과 정묘함, 그리고 다의성을 되살리고자 노력함으로써 엄격하게 통제되는 공산주의자의 영화 만들기 시대에 반발하고 있었고, 이는 중국영화에 새로운 형식적 구조와 영화언어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의 영화감독들은, 반발해야 할 거라곤 영화산업을 돈이나 찍어내는 면허로만 보는 경향뿐인 상황에서 일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과제지만, 그 배후에 국가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의 키를 찾는 강박이 있다는 것은 아주 비슷하다.
전의를 잃어가는 한국 중년의 초상
임순례의 새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 적절한 사례다. 캐릭터들과 스토리라인은 완전히 ‘지역적’이며(local), 특정 현장에 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임순례의 진정한 주제가 분명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과 사회, 그리고 문화라는 동시대 한국을 포괄한다는 것을 놓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명하게도, 이 영화는 은유적인 차원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상한 상징주의도, ‘거대한 테마’를 직접적으로 환기시키는 장면도 없다. 대신 임순례는 캐릭터들와 플롯, 그리고 세팅의 디테일을 축적하면서 좀더 폭넓은 의미의 추론(결론)을 조용히 이끌어낸다. 영화 만들기의 스타일은 단정적이지 않고, 점진적으로 커다란 그림을 드러내는 방식은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들이 만들어내는 효과와는 아주 다른 감정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1980년대 중반 고등학교에서 만들어진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흘러간 팝송과 가요를 연주하면서 떠돌아다니는 밴드다. 원래 멤버 중 유일하게 아직도 밴드에 남아 있는 사람은 강성우. 밴드의 행로는 끝나가고 있다. 쇠락해가는 클럽들이나 이따금 있는 결혼식, 미인대회 행사장 같은 곳에서 연주하며 적은 보수를 받고 전전하는 상황에서, 색소폰 주자가 떨어져나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남은 세명의 멤버들은 이 밴드가 시작된 지방인 수안보의 와이키키 클럽에 머물기로 한다. 15년 동안 찾지 않았던 고향을 방문한 성우는, 옛 친구들이자 전 밴드 멤버들, 그리고 인희와 재회한다. 성우가 한때 가망없이 푹 빠졌던 인희는, 이제 야채 배달로 힘겹게 살아가는 과부가 돼 있다. 밴드는 수안보에서 결국 와해된다. 드러머인 강수는 술과 마약에 굴복하고, 신시사이저 연주자인 정석은 신의없이 어느 여가수와 새로운 동업에 나선다. 성우는 흥청거리는 주신제로 변하는 가라오케 파티에서 연주하며, 손님에게 나체로 연주하라고 강요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여기서 임순례가 탐사하는 주된 이슈는 중년이 느끼는 환멸이다. 성우와 예전 밴드 친구들, 그리고 인희는 현재와 10대의 시간으로 담은 긴 플래시백으로 보여지는데, 그들의 청년기는 패배하고 기대에 어긋난 삶을 살아가는 현재의 느낌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모두 서로를 부러워한다. 예전에 밴드를 함께했던 친구들은 성우가 아직도 음악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보다 행복할 거라고 상상하고, 성우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상황을 극복하고 생계를 위해 단순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인희의 묵묵함에 감탄한다. 인물들이 높은 이상을 가진 젊은이들이었다가 점차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자체가 이슈는 아니다. 청년기도 좌절과 모순된 감정으로 힘든 시간으로 보여진다. 원래 밴드 멤버들은 서로의 팬티를 끌어내리며 밀려드는 파도 속에서 벌거벗고 장난치며 놀던 때보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 중년이 패배감을 주는 것은 하루하루의 싸움이 더이상 싸울 가치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순간순간 계속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본래 소극적인 성우를 포함해 모든 인물들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다.마초적 남성관을 거부하는 캐릭터
데뷔작 <세친구>에서 그랬듯, 임순례는 남성 캐릭터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약간의 연민과 함께) 낙오자로 그려낸다. 그의 관점은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보이는 남자다움의 ‘영웅적인’ 이미지와 정확히 반대다. 이는 과연 대부분의 한국 남성들이 스스로 갖고 있는 이미지와 충돌할까, 아니면 남성 관객에게 서글픈 인정을 끌어낼까? 잘 알려진 한국 감독들 중에서 전통적인 한국의 마초적 가치관이 없는 남성 캐릭터를 꾸준히 만들어온 것은 장선우 정도지만, 새로운 감독들 중에서 마초적인 전형을 뒷받침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임순례만이 아니다. 임순례의 영화는, 과소평가된 이상인의 <질주>나 곽경택의 <억수탕>과 <닥터 K>, 요즘 문승욱의 <나비>와 그런 요소를 공유한다. 이러한 영화들이 강제규필름의 ‘블록버스터들’처럼, 명백한 마초의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의 중량에 맞서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된 규범과 가치관에 도전하려 하지 않는다면, 독립영화적인 영화 만들기는 무가치한 것이다.
영화의 폭넓은 전망은 라이브 음악에서 가라오케로의 변화, ‘쾌락적인’ 팝송의 커버 버전에서 좀더 단순했던 시대에 대한 강한 향수를 지닌 가요로의 변화, 비교적 번영을 누리던 온천 도시에서 전형적인 소도시의 침체를 거치는 수안보의 몰락 같은 디테일로 구축된다. 정치적인 문제는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언급될 뿐이다. 옛날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멤버였던 수철은 현재 구청에서 일하고, 환경적인 이유에서 수안보 온천의 재개발에 대한 반대를 맞닥뜨리고 있다. 임순례는 이 도시의 경제 부흥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일이 지역 생태와 환경을 해친다는 이유로 공격받는 사실의 역설을 지나치듯 보여주지만, 그 서브플롯을 처리하는 데 있어 수철이 죽고 난 뒤 표면화되는 재정적인 핑계와 부패에 대한 비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치는, 한국사람들이나 사회 전반이 급속한 사회적, 경제적 변화에 적응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영화는 암시하고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결과적으로 무력함과 후회의 정서에 지배되고 있다. 이러한 축소판에서 보여지듯, 임순례는 스토리를 거의 고정된 와이드앵글숏들로 얘기하고 장면 커팅을 최소화함으로써 국가의 상황에 대한 비관적인 분석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미학적 전략은 전반적으로 무력감, 어느 쪽으로의 몸짓이든 제한되고 한정된 느낌을 자아낸다. 영화에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은, 성우와 인희가 강변에서 얘기할 때처럼 인물들이 일시적으로 일과 숙소를 뒤로 하고 떠날 때뿐이다. 마치 어떤 의미에서든 좀더 넓은 세상의 가능성을 얻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 이탈할 필요가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임순례는 시각적인 구성의 범위를 한정함으로써, 그리고 웨이터 기태가 음악을 가르쳐달라며 밴드의 각 멤버들에게 번갈아 접근하는 것처럼 줄거리를 짜는 데 반복의 패턴을 사용함으로써, 정체된 느낌을 합성해낸다.
하지만 고뇌하는 중년 세대라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뭔가 다른 일, 동성의 유대와 이성간의 파트너십처럼 성과 관련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임순례는 그의 영화언어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장면전환으로 그러한 조짐을 보인다.
꿈의 와이키키는 사라지고, 또다른 시작
밴드의 유래로 돌아가는 길고 중심적인 플래시백은 네 친구들의 해변장면에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소년들 중 두명은 이미 팬티를 벗은 채 파도 속에서 나체로 뛰어논다. 이내 세 번째 소년이 성우를 모래 속에서 잠든 채로 남겨두고 그들에게 합류한다. 친구들은 성우의 몸을 덮은 모래로 가슴까지 만들어 여성의 몸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놨다. 이 시퀀스는 이 영화의 유일한 크레인숏으로 끝난다. 인적없는 긴 해변을 벌거벗고 달리는 네 소년들을 하이앵글로 잡은. 임순례는 이 장면에서 여자들이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뛰어다니는 가라오케 비디오장면으로 넘어가면서 현재로 전환한다. 이 비디오에서는 이 여성들이 마초 남성 서퍼들과 있다는 것을 잠깐 보여준다.
이같은 전환은 성우가 가라오케에서 난폭한 손님에게 나체로 연주하길 강요당하는 가장 쇠락한 순간에 반대로 나타난다. 이때 가라오케 비디오 화면의 이미지는 앞서 보여진 것과 다르지 않다. 서퍼들, 가슴이 큰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 하지만 이는 갑자기 플래시백의 마지막 숏들의 반복장면과 뒤섞인다. 친구들이 성우의 옷을 벗기고 바닷가로 끌고 가고, 이어지는 마지막 크레인숏. 이는 성우의 주관적인 기억이라고 합리화될 수 있으나, 그 이미지는 성우가 아닌 영화감독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영화언어의 이같은 형식에는 좀더 넓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폭넓은 의미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몇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임순례는 은밀한 형식주의자일 것이다. 카메라가 작은 무대에서 연주하는 밴드에서 아주 천천히 뒤로 빠져나오며 그 앞에서 춤추는 커플들을 보여주는 엔딩은 오프닝 시퀀스와 정확히 맞물리기 때문이다. 첫 장면은 어느 클럽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그 밤의 마지막곡을 연주하는 밴드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은 성우와 정석이 새 여성 보컬이 가세한 새로운 포스트-와이키키 브라더스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을 보여준다. ‘와이키키’가 꿈이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끝났다. 미래가 어떤 모습이든, 더이상 남성적인 유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역시 분명하다.토니 레인즈/영화평론가
토니 레이즈(Tony Rayns)는 영국 영화평론가로서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and Sound)에 정기 기고하고 있으며, 벤쿠버영화제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