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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데쓰 프루프>

쿠엔틴 타란티노는 어떤 영화감독인가

쿠엔틴과 타란티노와 쿠엔틴 타란티노. 운전자가 죽지 않도록 제작된 차량을 몰고 다니면서 여자들을 상대로 엽기적 사고를 저지르는 남자 얘기를 다룬 <데쓰 프루프>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바로 그것일 게다. 이 영화는 쿠엔틴 타란티노가 어떤 감독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 호모루덴스 타란티노(유희적 인간)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참여했던 영화의 현장에 대해 “감독이 재미있는 사람이라 촬영장이 늘 파티 같았다”고 말한다. 타란티노의 실제 촬영장이 파티 같은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분명 파티 같을 것이다. 이 영화엔 재미난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는 일곱살 꼬마의 마음이 있으니까. 타란티노는 자동차와 미녀라는 B급영화의 두 가지 단골 모티브가 지닌 오락성을 노골적으로 추구한다. 몸을 구부린 미녀는 팽팽한 엉덩이와 늘씬한 다리로 시선을 빨아들이고, 달리는 자동차는 곡선주로의 현란한 스티어링과 직선주로의 아찔한 질주로 긴장을 선사한다. 더 흥미로운 건 그 미녀가 그 자동차를 운전한다는 것!

2. 호모파베르 타란티노(도구적 인간) 그러니 타란티노가 촬영까지 맡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이 영화는 마지막 20여분의 자동차 추격전을 위한 작품이고, 그 자체로 영화적 스릴을 탑재한 ‘비클’(Vehicle)이다. CG의 도움을 받지 않은 카 체이스는 사상 최고의 자동차 추격전이라고까진 할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놀이동산의 성능 좋은 범퍼카에 올라탄 것 같은 실감을 준다. 이 영화의 도구는 가죽벨트와 자동차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물 자체가 랩댄스에서 스턴트까지, 시각적 쾌감을 실어나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출연배우 목록 맨 위의 커트 러셀은 주인공이 아니다. 동정의 여지라곤 없는 이 변태 악당은 묵직하고 튼튼해 더욱더 두들겨줄 만한 샌드백이고, 관객 스트레스를 모두 흡수해 축제의 끝에서 요란하게 터지는 폭죽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자들은 전설적인 자동차의 성능 좋은 부품이고 지치지 않는 토킹 머신이다.

3. 호모로쿠엔스 타란티노(언어적 인간) 그렇다 해도 영화의 70∼80%를 수다로 채웠으니, 지나치긴 하다. 좋아하는 감독이 하필 자신의 생일날 여배우 대릴 한나의 대역과 잤다고 분개하는 사연처럼 흥미로운 내용도 있고, 뻔하게 수작 거는 남자들과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여자들의 화학작용을 킬킬거리며 보는 재미도 있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타란티노의 시시껄렁한 대사들은 러닝타임을 늘리기 위한 클리셰가 아니라 감독이 가장 중시하는 영화적 요소 중 하나이니까.

4. 호모그라마티쿠스 타란티노(문법적 인간) 타란티노가 그 못잖게 중시하는 건 문법이다. 그는 언제나 형식주의자였다. 70년대의 B급영화 전용상영관인 그라인드 하우스 시절 영화 특유의 끈적한 공기를 살려내기 위해 일부러 스크래치를 넣고, 지직거리는 음향효과를 삽입했으며, 장면을 끊어먹기까지 했다.

5. 호모마지쿠스 타란티노(마술적 인간) 그 끝은 매직이었다. 장르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듯했던 타란티노는 결국 현란한 손놀림과 신선한 상상력으로 두터운 장르의 벽을 가볍게 통과하는 마술을 보여줬다. ‘남자’에 ‘여자들’을 맞세우는 플롯의 집중력과 최적의 순간에 공수전환을 이뤄내는 클라이맥스의 리듬은, 종반을 향해 치달으며 아찔한 가속을 보여주는 편집과 숏마다 유쾌하게 방점을 찍는 촬영의 도움으로 마법의 구두점을 찍는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시청각적 쾌락이 어디서 연유하는지 정확히 안다.

6. 호모아르텍스 타란티노(예술하는 인간) 되살려낸 70년대 B급영화의 분위기와 재미 속에 타란티노의 독창적 숨결이 불어넣어진 <데쓰 프루프>는 시대적 뉘앙스와 지역적 문맥이 공유된 환경에서 상영될 때 최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라인드 하우스가 없었고 70년대 미국의 B급영화에 대한 집단적 향수가 부재하는 머나먼 타국에선 누가 온전히 즐길 것인가. <데쓰 프루프>를 낳은 시공간적 컨텍스트를 짐작하고 하위문화의 키치적인 미학을 이해하려 하는 문화적 소수의 오락거리가 되지 않을까. 값싸고 거칠고 생생한 대중예술이 바다를 건너 문화 엘리트들의 교양으로 소비되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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