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8인의 여인> 8월25일~10월7일/ 대학로 이다 1관/ 02-742-9005
여배우들의 카리스마를 제대로 느낄 기회다. 작가 로버트 토머스의 작품을 번안한 <8인의 여인>은 원작 연극, 그리고 같은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프랑수와 오종 감독의 <8명의 여인들>처럼 오롯이 여배우만을 등장시키는 작품이다. <8명의 여인들>이 다니엘 다리외,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등 프랑스 영화계의 여걸들을 내세웠다면, 이 연극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에너지가 넘치는 이주실을 비롯해 녹록지 않은 한국 여배우들을 팽팽하게 대립시킨다. <8명의 여인들>을 본 사람이라면 두 작품의 차이를 비교하는 재미가 의미심장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영화에서보다 훨씬 격렬하게 제시되는 반전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모자람없이 누릴 수 있다.
불이 켜진 무대로 여덟 여인들이 일렬로 입장한다. 배경이 되는 1950년대 프랑스 시골 저택의 거실은 제법 세심하게 완성돼 커다란 창문 뒤로 눈 내리는 바깥 풍경과 함께 이곳을 방문하거나 밖으로 나서는 인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왼편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아버지의 침실은 바로 그 위에 위치한다. “이건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이야. 절대로 알면 안 되는 비밀 얘기야.” 막내딸 까뜨린느(방진의)가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읊조리며 연극은 시작된다. 유학 생활을 하던 맏딸 쉬종(이영윤)이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날, 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된다. 사나운 개가 밤새 조용했던 걸 보면 범인은 분명 그들 중에 있는 셈. 게다가 모든 여인들이 왠지 조금씩 수상쩍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집안에 꼼짝없이 고립된 상황에서 서로의 음모를 낱낱이 폭로하고 만다. 외할머니 마미(이주실)는 사업이 기울어 힘들어하던 아버지가 채권을 빌려달라고 부탁해도, 얹혀사는 신세임을 망각한 채 독하게 굴었다. 까탈스러운 노처녀 오귀스틴(박명신)은 아버지를 짝사랑했지만 속내를 터놓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어머니 갸비(이연규)는 여느 교양있는 상류층 부인같이 남편을 향한 사랑을 과시했으나 사이가 멀어진 채 각방을 쓴 지 오래였다. 술집에서 일하는 고모 삐레에떼(정재은)는 간간이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낸 전력이 있다. 안주인마냥 훈계를 늘어놓는 요리사 샤넬(구혜령)은 “이 집에는 모범이 되는 여자가 없다”며 아버지를 괴롭혔고, 도발적인 하녀 루이즈(진경)는 기실 그의 내연녀였다.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던 쉬종마저 아버지의 유산을 소원했던 일이 드러나자 범인 물색은 더더욱 안개 속으로 빠져든다.
연극 <8인의 여인>은 뮤지컬적 요소가 강하게 느껴지는 <8명의 여인들>보다 한결 사납다. 춤과 노래로 심경을 암시하던 영화 속 여인들과 달리 이들은 말 그대로 괴성을 지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운다. 동성애, 불륜, 엘렉트라 콤플렉스 등 전복적인 면은 조금 덜하지만 여배우들의 화끈한 연기력을 입증하기에 적절한 설정이다. <8명의 여인들>의 우아함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갸비와 삐레에떼가 사랑을 두고 번갈아 내놓는 표현 외에도 시적인 몇몇 대사에 매혹당할 듯. 물론 일곱 여인들이 사내아이처럼 굴던 까뜨린느에게 치마를 입히는 장면에 이르면 두 작품의 결론이 동일함을 알게 될 것이다. 여인이 되기 위해선 비밀과 음모가 필요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