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리셋> 쓰쓰이 테쓰야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당신의 인생은 실패했습니다, 리셋하십시오.” 실패했다고 리셋하는 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쓰쓰이 데쓰야의 만화 <리셋>에는 실제 상황에서 눈앞에 그런 문구를 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리셋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플레이어 자신이 죽는 것뿐이다. 하지만 게임을 벗어난 실제상황에서 죽는다면 결론은 리셋 불가, 오직 죽음뿐이다. <리셋>은 게임에 빠져 살다 자살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연속으로 발생하는 사건을 그린다.
쓰쓰이 테쓰야의 <맨홀> 1, 2, 3권과 <리셋>이 박스 세트로 함께 출간되었다. ‘테츠야 츠츠이 공포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왔지만 이토 준지풍의 만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특별히 공포를 느낄 정도는 아니다. 그림체가 주는 잔혹함보다는 쓰레기만도 못한 최악의 인간을 보는 공포쪽이 훨씬 강렬하다.
<맨홀>은 벌거벗은 한 남자가 피를 토하며 죽는 데서 시작한다. 죽은 남자의 몸에서 기생충이 발견되고, 그의 피를 뒤집어쓴 남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죽는다. 단순 살인사건이나 자살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던 경찰은 이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기생충을 통해 범죄를 유발할 수 있는 인간의 강한 욕구를 거세시키고자 했던 용의자를 점찍는다. 사건은 점점 확대되는데, 일선에서 수사하던 형사마저 피에 감염된다. 수사진은 범인이 단순 흉악범이 아니라 지능적인 사상범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범인의 목적은 세상의 정화, 악한 욕망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쓰쓰이 데쓰야는 필라리아라는 기생충이 인간을 숙주삼아 번식하는 과정을 자세하고 끔찍하게 그려냈다.
쓰쓰이 테쓰야는 치밀한 사건 전개와 심리 묘사 양쪽에서 고루 장점을 보이는 작가다. <리셋>의 경우 좀더 이야기를 펼쳤다면 더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드는 건 <맨홀>에서 작가가 보여준 이야기 솜씨 때문일 것이다. <맨홀>이 따뜻한 정서나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매끄럽게 구사한다는 점은 특히 장점이다. 고통이 너무 커서 복수를 결심한 한 인간의 드라마나, 신참 형사와 베테랑 형사가 콤비를 이루어 범인을 쫓는 경찰물 혹은 코믹한 성격이 가미된 폭력/공포물 그 어느 것으로 읽어도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스스로 욕망을 제어할 수 있으면 뇌는 파먹히지 않는다”라는 <맨홀> 속 대사는 꼭 기생충에 관련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리셋>에 등장했던 천재 해커 키타지마가 <맨홀>에서도 잠시 등장하니, 두 작품 모두 읽는다면 <리셋>을 먼저 읽는 편이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이어지지는 않지만, 키타지마의 이력이 <리셋>에서 좀더 자세하게 기술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