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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장르의 껍질을 벗기고 살인을 쫓다

기호화와 해석의 문제로 연쇄살인 들여다본 데이비드 핀처의 <조디악>

*이 글에는 <조디악>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릴러 장르는 응축되었던 긴장감을 범인(혹은 진실)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 일시에 폭발시키며 쾌락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성적 오르가슴과 유사성을 지닌다. <조디악>은 얼핏 스릴러 장르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홍보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구사하는 기본 전략은 이러한 오르가슴을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일종의 ‘지루 전략’이다. <조디악>이 장르적 쾌감과 거리를 둔다는 사실은 영화의 엔딩, 20년이 넘도록 미해결로 남아 있는 사건의 용의자를 진범으로 (관객에게) 확인시키는 장면을 참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데이비드 핀처는 가장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장면에서 의외의 침착함을 보여준다.

물론 침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나 가능한 표현이고, <조디악>의 스릴러답지 않은 전개에 실망한 관객이라면 밋밋하다 못해 허무한 엔딩이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디악> 이전의 데이비드 핀처가 영화적 스타일에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테크니션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핀처가 원하기만 했다면, <조디악> 역시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하는 스타일리시한 작품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핀처의 바람이 아니었다. <조디악>에서 핀처는 장르영화의 관습을 따라가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이전 스타일과도 (일시적일 수도 있겠지만) 모질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있다.

장르적 리얼리티를 벗겨낸 스릴러

문학이론가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스릴러 장르가 현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리얼리티를 구축한 장르라 지적한다. 가령, 스릴러 장르에서는 정황상 범인으로 보이는 인물이 트릭으로 기능하는 반면에, 범인일 가능성이 없었던 인물이 진범으로 밝혀지는데, 이는 현실이 아닌 장르의 리얼리티일 뿐이다. 애초에 범인처럼 보였던 사람이 진범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현실의 리얼리티를 스릴러 장르가 그대로 모방한다면, 관객은 너무도 현실적이야, 라고 감탄하기는커녕, 스릴러 장르로서 부족하다든가, 밋밋하다거나 심지어 ‘속았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스릴러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배신한 장르의 리얼리티와 이를 위한 컨벤션을 완성하고, 관객은 그것을 묵인(지지)한다.

문제는 현재의 대중이 현실의 사건을 그 자체로 바라보기보다는 장르의 리얼리티(또는 매스미디어)에 비춰 사고한다는 점이다. 이는 로버트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홀)가 형사인 데이빗 토스키(마크 러팔로)를 처음 봤을 때 “<블리트>에서처럼 총을 옆구리에 차고 있어요”라고 신기한 듯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매스미디어와 영화에 의해 수도 없이 인용되었던 조디악 킬러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조디악을 아는 만큼 그를 오해할 수밖에 없다. 핀처는 조디악에게 ‘덧입혀진’ 장르적 리얼리티를 벗겨내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살인이라는 행위를 두고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조디악>의 살인은 무척 간결하다. 구구절절한 그 무엇도 없는 살인. 핀처는 세번의 살인장면에서 영화적인 공포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테크닉을 자제함으로써, 살인은 말 그대로 살인이 되고, 살인마는 그저 살인마로 한정되도록 한다. 이는 유력한 용의자인 아더 리 알랜(존 캐럴 린치)에게 접근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핀처는 관객이 기대했을 만한 순간을 의도적으로 배신하는 것, 달리 말해 매스미디어와 여러 영화에 의해 이리저리 포장되며 신비한 분위기까지 내비쳤던 조디악을 그저 살인마라고 말하기를 원한다. 1969년 7월4일 이후 가장 멋대가리 없고 시시한 조디악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핀처의 조디악’이다. 결국 핀처가 조디악의 형상을 그려내는 방식은 제거하기, 즉 장르적 리얼리티로 덧입혀진 불순물을 조디악으로부터 제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호화된 조디악과 해석되지 못한 살인

흥미로운 것은 스타일리스트로서 핀처의 잔영이 진하게 느껴질 때가 조디악이 매스미디어(활자와 카메라)를 통해 하나의 ‘기호’로 변형되는 장면이라는 점이다. 핀처는 이 현란한 편집장면을 통해 조디악에 매료된 매스미디어, 그럼으로써 더욱더 비의적 상형문자가 되어가는 조디악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몽타주된 조디악과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욱더 비의적 기호가 되어가는 조디악. 여기서 우리는 조디악의 편지가 경찰이 아닌 신문사에 발송됐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심지어 조디악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는 범죄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기까지 한다. 이는 조디악이 자신을 암호로 표현했다는 사실과 공명한다. 일반적인 살인마가 자신을 숨기려 하는 것과 다르게, 조디악은 스스로를 암호(기호)화하여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일종의 ‘해석 게임’(퍼즐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의미이다. 나를 해석하라, 라는 호명, 혹은 장난 섞인 게임의 제안.

어쩌면 수사라는 것도 일종의 해석이다. 범죄 현장에 남아 있는 증거(기호)를 해석하여 그에 어울리는 범인을 유추하고 검거하는 해석 행위 말이다. 실제로 세 형사가 용의자 리를 조사하는 장면은 거의 기호학적 해석처럼 보인다(핀처는 리를 범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호 하나하나에 힘있게 방점을 찍는 방식으로 이 장면을 연출한다). 기호로서의 조디악이 승자라면, 이는 그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해석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핀처는 미셸 푸코가 담배 파이프 사진을 두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말했듯이, 이것은 조디악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자 한다. 조디악 연출, 매스미디어 촬영 및 편집으로 완성된 기호 조디악은 결코 실제의 조디악이 아니다(시시하다 못해 무능해 보이는 리를 상기하라).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조디악>은 기호로서의 조디악을 해석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연쇄살인마가 기호화되는 과정과 그 불가해한 기호를 해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호학자들(형사와 기자, 그리고 그레이스미스)을 그리는 영화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초반부는 조디악이 스스로를 암호화하는 과정과 그것을 더욱 불가해한 기호로 만드는 매스미디어에 관한 이야기, 중반부는 그 해석의 미궁 속에 갇혀 길을 잃은 가련한 자들에 관한 이야기, 후반부는 그레이스미스가 모든 이들이 길을 잃고 쓰러졌던 그 기호의 미궁 속에서 희미하지만 확실하다고 믿는 출구의 문을 발견하기까지의 이야기, 이렇게 구성된.

기억을 뒤덮는 현실의 냉혹한 시간

사실, 기호라는 것을 해석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기호의 해석은 기호의 살해 행위이다. 케인의 로즈버드, 그것을 완벽하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기호로서의 로즈버드보다 매혹적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기호를 해석하고 난 뒤에나 가능한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해석되지 않는 기호가 자신을 해석해달라고 요구할 때, 그 요구가 갖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 지는 이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굳이 첨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조디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바로 이러한 기호를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디악의 첫 편지를 받았을 때, 그레이스미스의 관심 역시 그가 보낸 암호문을 해석하는 것이었지, 그를 잡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호의 힘도 시간 앞에서는 결코 한결같을 수 없다. 시간은 때로 자애롭게 진실을 건네기도 하지만, 대체로 진실을 향한 의지를 무디게 하는 법이니 말이다.

<조디악>이 그려내는 현실은 바로 이러한 시간이 갖는 냉혹함이기도 하다. 토스키의 말마따나 조디악의 편지가 끊긴 3년 동안 200건 이상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세상에 살면서 조디악에게 여전한 관심을 갖기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이를 의식이라도 한 듯, 핀처는 그레이스미스가 조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 시점을 형사 윌리엄 암스트롱(앤서니 에드워즈)이 조디악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음을 토스키에게 고백하는 장면 뒤에 붙여놓았다(실제로 그는 떠나는 부인에게 ‘아무도 안 하기 때문에’ 조디악의 진실을 밝히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레이스미스는 조디악을 기억하던 자들마저 뒤돌아설 때 오히려 그를 향해 뛰어든다. 결국 그레이스미스가 싸우는 대상은 불가해한 기호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래 속에 파묻으려는 시간이기도 한 셈이다.

핀처는 이 영화가 조디악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영화나 그 범행 동기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영화가 아닌, 해석 불가능한 기호의 미궁 속을 해매다 지친 자들의 처진 어깨와 지친 발걸음에 대한 영화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어서, <더티 하리>의 주인공처럼 법의 절차를 무시하고 사건을 해결하거나, 멋들어지게 경찰 배지를 내팽개칠 수 없다. <조디악>의 인물들은 러닝타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냉혹한 시간을 견뎌내야 했던 자들이다. 영화의 엔딩, 무려 24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피해자는 유력한 용의자의 사진을 확인한다. 핀처는 이 단순한 법적 절차를 갖는 데 무려 24년이 지났다, 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려는 듯 의외로 너무 간결한 방식으로 이 장면을 연출한다. 긴 시간 축적되었던 피곤함마저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한때 그토록 뜨겁게 타올랐던 도가니가 차갑게 얼어붙기까지 흘러갔던 시간의 질감, 그 현실의 리얼리티가 필름 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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