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구름(黃雲)이 지나가면 흑백화면이 컬러로 바뀐다. 흑백화면은 참전한 모두를 평등한 군인인 척 위장하지만, 컬러화면이 그들의 피부색까지 감출 순 없다. 유럽 연합군들은 승리의 샴페인을 백인을 위해서만 터뜨렸을 뿐, 영광은 결코 유색 군인들의 이름을 호명해주지 않았다. 프랑스 전쟁영화 <영광의 날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아프리카 북부와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싸운 아랍 자원군들의 서글픈 참전기를 다뤘다. 갈색 피부의 프랑스 군인들은 사실상 피와 전쟁의 노래인 <라 마르세예즈>와, “아름다운 프랑스 국기를 지키기 위해, 식민지 땅에서 조국을 구하러 왔다”는 군가를 부른다. 영화는 자연스럽게도 전쟁영화의 익숙한 수사인 반어를 취해 제국들의 전쟁이던 제2차 세계대전을 ‘영광의 날들’이라고 명명한다. 영광은 백인들의 것으로 독점됐지만, 죽음은 피부색을 차별하지 않았다. 제국들의 전쟁에 끼어든 아랍의 군인들은 단지 ‘자원군’이라는 초라한 위로로 무덤의 십자가 아래 누여진 채 보상 없이 망각되었다. 알제리 이민자로 파리에서 나고 자란 감독 라쉬드 부샤렙의 <영광의 날들>은 프랑스 현지에서 고요한 분노와 반향을 일으켰고, 2006년 9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8만명의 토착민 참전 군인들이 당시 프랑스 군인들과 같은 사회적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법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사지에는 유색 인종의 보병들을 먼저 보내고, 이들의 죽음을 밟으며 연합군은 파시즘에 맞선 영광의 승리를 얻었다. 이 승리는 수많은 순진한 유색의 애국주의자, 국가의 부름에 잘못 호명된 검은 프랑스 군인들의 시체를 구차하게 딛고 서 있다. 신병기를 다루는 백인들의 총알받이로 나선 유색인들의 육탄전을 보는 것과 같은 참으로 서글픈 전쟁의 이미지는 없다. 전쟁은 인간을 움직이는 물질로 만든다. 아무리 지적인 논리를 갖다 댄다 하더라도, 역시 식민을 경험한 사람은 가해자들이 말하는 탈식민이라는 요란한 수사에 동의할 수 없다. 언어를 선취하여 식민지인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었던 자발적 식민주의자에서부터 가장 철저한 방식인 폭력으로 저항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국이나 민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존과 실존이다. 이 영화는 전쟁의 스펙터클과 요란한 드라마로 선동하지 않으며 다만 차분하게 보여주면서 고요히 물을 뿐이다. 나라 잃은 자들을 위한 조국은 없다, 누가 그들을 기억할 것인가?